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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키 넘버>(Lucky Numbers)
2001-09-20

<럭키 넘버>(Lucky Numbers)

2000년 감독 노라 에프런 출연 존 트래볼타, 팀 로스 장르 스릴러(CIC)

노라 에프런이 이런 영화를 만들 줄 누가 알았으랴. <럭키 넘버>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수줍은 망설임도 <유브 갓 메일>의 소프트아이스크림 같은 연시도 없다. 대신 사악한 음모와 배신, 날것의 욕망이 있다. 에프런이 혹시 로맨틱코미디의 달인이라는 훈장을 떼내기 위해 타란티노를 벤치마킹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아닌게아니라 존 트래볼타와 팀 로스를 기용한 점이나, 잔혹한 유머를 서슴지 않는 걸 보면 영락없는 <펄프 픽션>의 변주 같다. 이 예상 밖의 시도는 적어도 미국에선 성공적이지 않았다. 평도 시원찮았고, 지난해 10월에 개봉해서 1천만달러 남짓 벌었을 뿐이다.

한국에서도 비디오로 직행한 처량한 신세가 됐지만, <럭키 넘버>는 별다른 기대없이 뽑아든 사람에게라면 뜻밖의 즐거움을 선사할 만한 영화다. 요즘 주가가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존 트래볼타와 팀 로스의 투톱에다 인기 시트콤 <프렌즈>의 리사 커드로와 빌 풀먼으로 이어지는 캐스팅 파워는 어느 영화에도 꿀리지 않는다. 인물들은 비교적 단순하지만 이야기는 여러 겹 꼬아놓아서, 그냥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킬링 타임용으론 충분하다. 그러나 주전공을 내던진 대가를 피할 수 없었던지, 에프런은 어수선한 사건을 끝내 정리하지 못하고 서둘러 끝내 허전한 뒷맛을 남긴다.

존 트래볼타가 연기하는 러스는 지방 방송사의 인기 기상캐스터. 곳곳에서 사람들이 열렬히 반겨주고, 식당에 가면 전용 주차공간에다 자기 이름을 딴 오믈렛까지 있으니, 남부러울 게 없지만,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 스노모빌 판매사업을 하다 2만5천달러의 빚을 떠안게 된 것이다. 이 크지 않는 빚이 화를 부른다. 스트립바를 운영하는 음험한 친구 긱(팀 로스)의 제안을 받아들인 게 잘못이다. 긱의 제안대로 방송사의 복권추첨 조작을 위한 러스의 눈물겨운 음모가 시작된다. 제1조력자는 복권추첨 도우미 크리스털(리사 커드로). 이 여인은 방송사 사장과 러스를 동시에 애인으로 거느리고 있다. 푼수끼는 <프렌즈>의 피비 캐릭터에서 그대로 가져왔지만, 알고보면 러스보다 한수 위다. 여기에 살인마 데일이 가담하고, 무기력하고 소심한 경관 레이크우드(빌 풀먼)까지 끼어들면서, 러스의 순진한 음모는 통제불능의 소동으로 빠져든다.

이런 이야기가 잘 풀리면 멋진 블랙코미디가 될 테지만, <럭키 넘버>는 잘 나가다가 고지 한발 앞에서 무너진다. 인물들의 생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팀 로스는 너무 굳어 있고, 미끈한 몸매를 수시로 과시하는 리사 커드로는 푼수 여인과 악녀의 두 얼굴이 잘 섞이지 않는다. 빌 풀먼도 어정쩡하게 어설프다. 모두 거친 삶을 살아가지만 쓰라림이 잘 전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야기는 꽤 재미있는데도, 인물들이 사건에 끌려다닌다는 느낌이 든다. 다만, 외모는 점점 항아리 모양을 닮아가지만 존 트래볼타만은 심약하고 우유부단한 대중스타의 곤경을 끝까지 실감나게 연기한다. <럭키 넘버>는 실패했지만, 이건 흥미로운 실패담이다. 로저 에버트는 “웃자고 보면 너무 잔인하고, 심각하게 보기엔 너무 가볍다”고 평했다.

허문영 moon8@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