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ulture > Enjoy TV > TV 가이드
비정상을 정상으로 산다는 것은
2001-09-20

10대 마녀의 성장기, 시트콤 <사브리나>

현재 KBS 홈페이지 시청자 게시판을 가장 뜨겁게 달구고 있는 TV 시리즈는? 압도적으로 <X-파일> <가을동화> <사브리나>(Sabrina, the Teenage Witch)이다. <사브리나>는 영화 <사브리나>하고는 관련이 없다. 제목 그대로 이름만 같은 ‘십대 마녀 사브리나’가 살아가는 일상을 다룬 시리즈로, 현재 미국에서는 5년째, 우리나라 방영은 2년째 되었다. 이 <사브리나>는 이모들이 마녀이며 말하는 고양이가 집에 있고 본인 역시 반쪽마녀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평범하게 살고 있는 소녀 사브리나의 이야기를 다룬 시트콤이다.

여기서 평범이란, 10대의 평범함이다. 풋풋하게 젊음이 차오르는 시기, 고민으로 가득 찬 시기를 보내는 일상이다. <사브리나>를 보면 미국의 전형적인 10대란 저런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하루하루를 살다가 갑자기 자기의 평생을 생각한다. 그리고 남들과 똑같이 살기 싫다고 외치다가도 남들과 섞여 살고 싶어한다. 특히나 남들과는 다른 사브리나가 그런 고민을 할 때마다, 과연 인간이 성숙함을 자각하는 시기는 오직 10대 때뿐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이런 10대 일상생활의 전형에 마녀로서의 책무가 어우러진다. 사브리나는 인간으로서, 마녀로서 모두 ‘성장’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과 마녀는 너무도 다르다는 것이 문제다. 이렇게 성장하는 것이 지상 최대의 문제로 떠오른 사브리나와, 성장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이모들의 좌충우돌은 폭소를 터뜨린다.

이 세상에 마녀로서 산다는 것을 중점으로 볼 때, 이 <사브리나>는 주책맞은 어른과 그만하면 나이보다는 마음이 더 자란 자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특히나 사브리나의 이모들 힐다와 젤다가 치고 받고(?) 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이들은 마녀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자라는 것을 거부하는 여자들의 전형으로 보인다. 이 둘은 인간의 삶에 잘 끼어들어 사는 것 같다가도 전혀 신경 안 쓰고 개의치 않는 어른 오리지널 마녀이다. 그래서 내가 가장 몰입이 잘되는 캐릭터가 힐다와 젤다이다.

인간이 먹는 나이는 단지 살아온 햇수에 따른 나이만이 아니다. 사회적인 나이가 존재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하도록 요구받는다. 그러나 마녀들은 사회적 요구를 가장 먼저 부인하는 존재이다. 사브리나 집안에서 가장 어른스러운 존재가 새까만 고양이 살렘이라는 설정도 이 고모들의 유아적 행동에 기폭제 역할을 해준다. 힐다와 젤다는 마녀이다보니 인간 사회에 꼭 맞춰서 살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늘 유쾌하고, 일탈의 즐거움을 은연중에 선사해준다. 인간이 아니니 앨리 맥빌 변호사처럼 유아스럽게 살다가도 자괴감의 구렁텅이에 빠질 일도 없다. 이들은 일탈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죄책감 없는 일탈이 되는 것이다.

작은 일탈의 즐거움. 왠지 이야기가 점점 <솔로몬 가족은 외계인>(3rd Rock from the Sun)과 비슷해지는데, <사브리나> 역시 마녀들을 통해서 인간으로서의 삶, 혹은 사회적인 생활에 대해서 비딱한 시선을 시종일관 유지한다. 그러나 그 비딱함이란 날카로운 가시가 아니다. 어지러울 정도로 몸을 흔드는 정도랄까. 그래서 정상적으로 살아가려 애쓰는 사브리나가 늘 이모들을 보며 어지러워 난감해하는 것이고.

<사브리나>에 대해 느끼는 중첩된 마음. <사브리나>는 어떻게 보든지 정말로 재미있다. “저 남자 귀여워! 사슴 같아!” 한마디에 그만 데이트하러 온 남자가 사슴이 되는 장면은 정말 포복절도 그 자체이다. 이렇듯 귀엽게 살아가는 사브리나와 그 식구들. 남자친구에게 기묘한 감정을 품으면서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침대에 엎어져 고민하는 장면은 약간 신파스럽기까지 하다.

이렇게 다른 삶을 살되 똑같은 고민을 하며 살아가는 사브리나. 평범한 고민을 약간 과하게 한다- 라는 시트콤의 규칙을 정말 정석대로 따르는 <사브리나>. 조금만 유명해진다 싶으면 그새 우리나라의 각 ‘시트콤’(정말 시트콤이라 부르기 민망하다, 한 시퀀스가 30초도 안 넘는데 시트콤이라니!)에서 베껴내는 현실을 생각할 때, <사브리나>를 많은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만 제발 방송 작가들만은 몰라줬으면, 하는 마음이 동시에 든다.

나는 고양이 살렘 목소리, 성우 오세홍의 목소리를 듣느라 이 시리즈 보다가 그만 푹 빠져버렸다. 이것도 사회적 나이 먹는 것을 거부했다는 증거 중 하나일지도?

남명희/ 대중문화평론가 worry@worryne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