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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당신이 좋다, 그 `순수한 육체`의 향연이 (1)
2001-09-21

수공업적 액션 하나로 세계인 사로잡은 작은 영웅에 바친다

<친구>에 나오는 중·고등학교 단체관람. 그 시절 단체관람의 레퍼토리에 가장 빈번하게 들어갔던 영화는, 시리즈와 함께 성룡의 쿵후영화였다. <사형도수>나 <취권> <소권괴초> 같은. 낡은 극장 1, 2층을 가득 메운 까까머리의 학생들에게 시리즈는 대단한 이상향이었다. 마침 로저 무어가 수영복으로 몸매를 과시하는 대규모 본드걸을 이끌고 나오던, 에이즈의 위협이 전혀 없던 시기였다. 섹시한 본드걸이 등장하면 환호성을 지르고, 제임스 본드가 그녀를 안으면 침이 꼴깍 넘어가고, 그것도 수백명이 한꺼번에.

하지만 성룡의 영화는 이상했다. 왕우의 <유성호접검>처럼 기상천외한 액션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성룡에게 이소룡 같은 카리스마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직 강호의 의리가 땅에 떨어지기 전이었으니, 공명정대한 ‘무협’에 싫증났을 리도 없었다. 하지만 어딘가 유치해 보이는 성룡의 영화는 당대의 남학생들은 물론,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든 영화관객을 사로잡았다. 유달리 멋있어 보이지도 않는, 대충 몸을 꼬아서 만드는 쿵후의 기본자세는 당장이라도 따라할 수 있을 것처럼 조금은 시시했다.

모든 무술의 가장 효과적인 요소만을 따서 만들어냈다는 이소룡의 절권도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게 성공요인이었을까? 누구나 따라할 수 있을 것 같은 ‘인간적’이고 ‘수공업적’인 성룡의 액션과 영화에는 친근함이 있었다. 공부하기도 싫고, 쿵후를 배우기도 싫지만, 어쩌다보니 신기한 무공을 익히고 부모의 원수까지 갚아야 하는 주인공의 처지도 동병상련이 일었다. 성룡은 홍콩의 무협영화에 흔히 등장하던 절세영웅이 아니었고, 세상의 모든 부조리와 맞서 싸우는 강인한 투사도 아니었다. 동네의 말썽꾸러기가 어쩌다보니 악당을 물리친 격이다. 입에서 입으로 퍼지는, 작은 동네의 전설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취권>의 폭발적인 흥행으로 스타덤에 올라

성룡의 영화는 갑자기 다가왔다. <취권>의 폭발적인 흥행으로 어느새 성룡은 최고의 흥행스타가 된 것이다. 성룡이 무명 시절에 출연했던 영화들까지 죄다 개봉을 했다. 생각해보니 나는 국내에서 개봉했던 성룡 영화의 98% 정도는 본 것 같다. <조수괴초> <사학비권> <당산비권> 같은 기묘한 제목의 영화들까지 빼놓지 않았다. 입체영화로 만들어진 <비도권운산>도 물론. 중학교 시절 <취권>과 <사형도수>를 시작으로 <샹하이 눈>과 <러시아워2>에 이르는 굽이굽이마다, 나는 늘 성룡을 보고 있었다. 딱히 성룡의 팬이기 때문은 아니다. 이연걸이나 아놀드 슈워제네거, 멜 깁슨이나 스티븐 시걸의 영화까지도 빼지 않고 봤고, 감독으로 따지면 제임스 카메론이나 폴 버호벤, 리처드 도너의 영화도 마찬가지다. 공통점이 있다. 그들의 영화는, 최소한 하나는 만족시켜준다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스티븐 시걸이나 장 클로드 반담이 치고 받는 액션만으로도 최소한의 만족을 남겨주는 것처럼. 그들의 영화를 볼 때는 이야기가 좀 후줄근해도, 참고 액션장면만 기다린다. 그리고 그걸로 만족한다. 그래서 스티븐 시걸이 직접 액션을 보여주지 않고 총싸움이나 하는 영화를 보면, 욕이 절로 나온다.

성룡의 영화는 더욱 그렇다. 요절한 이소룡의 작품의 워낙 편수가 적으니 비교대상이 될 수 없고, 이연걸의 경우를 보자. 이연걸은 <소림사>로 출발하여 <동방불패>와 <황비홍>에서 비약적 발전을 보였지만, <이연걸의 탈출> 같은 엄청난 졸작들도 필모그래피에 숱하게 끼어 있다. 이연걸은 스스로 감독을 고르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러나 성룡은 <프로젝트 A> 이후, 자신의 영화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증명했다. 1년에 하나 혹은 두편만을 만든다는 목표와 함께 누가 봐도 만족할 수 있는 오락으로 가득한 ‘수공예품’을 만든다고 천명했고 그것을 지켰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그 선언은, 미국 진출 실패의 여파였다. 홍콩의 최고 스타로 자리잡은 성룡은 이소룡처럼 바로 할리우드를 두드린다. <배틀 크리크> <프로텍터> <캐논볼>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관객은 성룡을 영웅이 아니라, 그냥 ‘꼬마’로 볼 뿐이었다. 성룡은 이소룡처럼, 거구의 백인을 제압할 카리스마나 파워가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 내 무술은 힘이 없어 보였다. 한대 때리면 그대로 쓰러지는 미국 액션물에 익숙한 관객은 내 영화를 보고 어리둥절해했다. 내가 발차기를 몇번 해도 쓰러지지 않으니까.’ <사제출마>에 나오는 것처럼 죽어라고 맞다가 악착같이 물고늘어지고, 친 데 또 치고, 악으로 버티는 성룡의 액션은 미국인들이 보기에 장난 같았다.

`모방천국` 홍콩에서 `오리지널`을 일구다

미국 진출에 실패한 성룡은 홍콩으로 돌아와 83년 <프로젝트 A>를 만든다. <프로젝트 A>는 바로 전해에 만든 <용소야> 같은 영화와 비교해보아도, 확연한 차별성이 드러난다. 단순히 배경이 된 시대의 차이가 아니다. <용소야>만 해도 전통적인 쿵후영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프로젝트 A>는 <보물섬>과 쿵후영화, 무성영화의 재기를 뒤섞은 새로운 홍콩영화였다. 어렸을 때 경극학원에서 원표, 홍금보와 함께 수련했던 애크러배틱 연기가 빛을 발한 것도 <프로젝트 A>가 출발점이었다. 세련된 구성과 참신한 액션으로 무장한 <프로젝트 A>는 성룡이 직접 감독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 이후 성룡은 자신이 출연하는 작품을 직접 컨트롤하기 시작한다. 성룡은 ‘모방 천국’인 홍콩영화계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트레이드마크를 창조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성룡의 영화 중에서 가장 많이 본 작품은 <쾌찬차>다. 10번 이상은 봤다. 솔직히 말하자면 <쾌찬차>가 너무나 좋았거나, 걸작이어서가 아니다. 고3 시절에 친구가 다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당시는 다방에서 비디오를 틀어줬다),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허구한 날 죽치고 앉아 있다 보니 <쾌찬차>를 10번은 넘게 본 것이다. 나 <스트리트 오브 파이어> 같은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영화들 중에서, 매번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었던 영화는 <쾌찬차>가 유일했다. <쾌찬차>는 볼 때마다, 혹했다. 이동용 자동차 하나를 끌고, 유럽을 누비면서 소동을 벌이는 성룡 일행의 액션은 아기자기하고, 상큼했다. 폭력이라기보다는 춤을 추는 것 같다고나 할까. 성룡이 이소룡보다는, 진 켈리와 프레드 아스테어에게 더 큰 영향을 받았다는 평가는 일리가 있다. 성룡의 액션은 움직임 자체만으로도 감흥을 일으킨다. 이연걸의 무술에서 기품이 느껴지는 것과는 또다른 아우라가 확연하게 느껴진다.

▶ 김봉석의 성룡론1

▶ 김봉석의 성룡론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