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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부장 때려가며 100키로 전기 끌어왔지”
2001-10-17

일본에서 배워온 기술로 조명 시스템을 독립시키다- 김성춘 (2)

동양영화사 대표하고 계약을 체결했어요. 일본에서는 기무라 소토지, 한국에서는 이규환 감독, 전인선, 임영옥, 그러구 춘향이는 문예봉. 기타 배우로 서월영, 박제행, 딱, 딱, 해서 계약하고 들어왔어요. 와보니 이규환이가 작품을 하고 있어요. 아까 얘기한 ‘멕시코 다방’ 뒷골방에서 안석영 작품을 가지고 이규환이를 비롯한 모두가 거기 모여 있다, 이런 얘기가 들려요(당시 이규환은 안석영 각본의 문예영화 <바다여 말하라>(1935)를 기획하고 있었다.- 필자). 그러니 이걸 어떡합니까?

이규환이 와서 하는 말이 “이왕 이렇게 된 걸 어떡하나. 그러니 쫌 기다려 주지” 그래요. 그런데 그때 김한(배우)이, 이명우(감독 겸 촬영기사), 이필우(감독 겸 촬영기사. 이 난을 통해 소개된 바 있다.- 필자) 이런 친구들이 <춘향전>을 할라 그러다가 때 없는 놈이 와 갖구선 <춘향전>을 발성영화로 한다고 잡지에 내고 신문에 내고 이러니까, 오늘낼 한번 (손을) 봐 줘야 한다고 뒤에서 별렀대요. 어쨌든 <춘향전>을 할라고 10월에 모였는데, 10월, 11월은 눈발이 날려 진행이 안 되거든. 그래서 <오돌단자>를 할라 그랬어요.

사상 검열당해 개명된 <살수차>

<오돌단자>는 처음엔 방한준이를 감독 시켰죠. 김일해를 주연시키고. 글구 석일량(배우)이라고 있는데 이놈이 8시에 집합이라면 12시까지도 나오질 않아. 왜냐? 병원에 다녀오기 때문에 늦는다! 맨날 그런 얘기지. 석일량은 속 썩이고, 김일해는 폼이 안 서고 그러는데. 김한이라는 놈이 “앗! 우리나라에서 그런 거 지금하면 안 된다. 제 누님 따먹고 메누리 따먹구 그게 우리나라에서 되느냐? 조선총독부에서 허가 안 된다” 그런 얘기지. 하다가 관두고 고쳐서 할라니까 그것도 또 안 된대.

그래서 나중에 <살수차>(일명 <보도(鋪道)의 이단자> 1935년 작- 필자)로 바꿨죠. 처음부터 다 바꿨죠. 근데 배우가 없지 않아요? 이규환이가 “다른 여배우는 안 되고 박제행은 갖다 써라”, 그래서 온 것이 박제행뿐이고. 하는 수 없이 나하구 김일해를 대사없이 등장시키고 감독은 방한준이 했어요. 각본은 방한준이랑 모두가 같이 앉아서 했지. 그땐 시나리오 작가라는 게 없습니다. <살수차>는 물 뿌리는 자동차 살수차죠.

그런데 물 뿌리는 것이 대체 뭐라고 그것 땜에 검열이 되네요. “서울에 먼지가 나니까 깨끗이 청소해서 다니기 좋게 하자, 이런 것으로 맨든 것이오” 그러니까 “그게 아니다. 사상이 암만 해두 틀려먹었다” 그러더군요(<살수차>는 매일 아침 서울시내에 물을 뿌리는 직업을 가진 남자의 이야기이다. 본래 서울 장안에 페스트가 유행해 많은 이가 사망하고 만다는, 암울한 일제상황을 은유하는 사회적 테마를 지닌 영화였으나 검열당국이 이를 대대적으로 개작하고, 원제 <보도의 이단자(異端者)>를 <살수차>로 개명케 했다.- 이영일 저, <한국영화전사>(1969)에서 인용).최초로 100kW 조명기 들여오다

일본 있을 땐 전부 카봉(Carbon light: 야간에 넓은 야외에서 촬영할 때 적합하도록 고광량의 빛을 발하는 무성영화시대 대표적 조명기다. 그러나 열 방출이 심하고 타는 소리가 요란한 단점이 있다. 열 때문에 촬영장에 있던 사람들의 눈과 얼굴이 부어오르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조명기사 최진은 눈이 멀고 말았다고 전해진다.- 필자)을 썼습니다. 하루저녁 밤을 새우면 배우든 조명기사든 모든 사람이 눈이 부어서 집에 가면 사과를 갈아서 붙입니다. 눈이 부어서 눈을 뜨지 못합니다. 아파서.

그래서 카봉 대신 브로드 라이트(Broad Light: 보조광선, 분광라이트로 추측됨.- 필자)를 쓰게 됐죠. 브로드 라이트 10대를 신흥키네마에서 맨들었는데 그때 토키를 처음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카봉 라이트는 소리가 너무 나서 노래하는 장면을 찍는 데 쓰면 안 되거든. 그래서 촬영할 때는 카봉 라이트하구 브로드 라이트하고 섞어서 썼죠. 그러구 있다가 일본이 전반적으로 브로드로 전향을 했거든요. <춘향전>(1935년- 필자)을 계약할 때 한국에 넘어 오니까 모두 카봉을 쓰고 있더군요. 그래서 조명기 계약을 해가지고 가야겠다 결심하고 100키로를 계약했어요(당시 김성춘은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텅스텐 라이트 80kW(Top Light)를 들여와 <살수차>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필자).

“로케이션 할 때도 브로드 했어요. 그땐 강했습니다. 100키로가 필요하다고 전기집에 가 얘길하면 100키로와트 따로 올려줍니다. 브로드 라이트를 동원해서 촬영하는 거지.”(이경순의 말. 이날의 대담에는 녹음기사 이경순이 동석했다.- 필자)

이경순씨 얘기대로 옛날에는 100키로씩 신청합니다. 처음에는 100키로를 해달라 그러면 깜짝 놀래요. “전기가 100키로까지 뭐 필요하냐?” 그러거든. 나한테 영업부장이 얻어 맞았어요. “원래 일본에서는 영화하면 100, 200키로 300키로 필요하다. 우리나라니까 100키로 필요하다고 그러는 거지” 하고.

팔방미인 식에서 전문 스탭시스템으로

우리나라에 조명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이 고때입니다. 당시까진 조명이 없었어요. 첫째로 분 바르는 배우, 고담에 연출, 고담에 촬영, 고담에 조명인데, 각자가 전부 다 했지. 녹음기사고 조명기사고 조연출이고 연기자고 없어요. 다하죠. 지금 그렇게 하라면 누가 하겠어요? (“그럼 김 선생님 들어오신 뒤에, 그러니까 <살수차> 이후에야 조명이라는 것이 우리나라에 비로소 있게 됐군요.”- 대담중의 이영일)

녹음은 나카가와가 <장화홍련>(1936년- 필자)까진 해주고 <아리랑 고개>(1936년- 필자)서부터 우리 기사가 녹음을 했어요(이때 이필우가 우리나라 최초의 촬영, 녹음기사로 활약했다.- 필자).

조선영화주식회사 때부터 본격적으로 조명이라는 이름을 맨들어 놓고 시작한 겁니다(“조명은 김 선생님이 기자재도 가져오고 기술도 배워 오시고 조명도 정식으로 차리고 해서 씨가 뿌려졌습니다.”- 대담중의 이영일). 의정부 촬영소에 있던 것이 10키로가 하나. 만척짜리죠. 그리고 5키로가 두대, 3키로 다섯댄가 여섯대. 그리고 2키로 전구가 없어서 10키로짜리 영사기 썼거든요. 최남주가 의정부에다 처음 조선영화주식회사 지을 적에(1935년- 필자)

일본 가서 라이트 전부 해 가지고, 제대로 촬영소에 변전소 내서 해놓고 그랬어요. 참 부러웠어요. 우린 이런 시설 못해 놓는데 이 양반은 벌써 이런 시설을 해 놓는구나. 경성촬영소 차렸을 때는 직장이 하나, 5키로가 하나, 3키로가 다섯대, 2키로가 다섯대, 브로드가 다섯개 이렇게 되구.

천장에서 내려오는 독구. 독구는 1키로짜리를 위에서 달았어요. 양동이 모양으로 맨들어서 그 속에 전구를 집어 넣고서 한 20키로로 그림자 안 가게 해주고. 라이트가 제대로 되니깐 역시 인물의 ‘카게’(影·그림자)가 선단 말야. 카게를 뭘로 없애느냐, 그러니까 독구를 하는 거야. 독구가 20키로짜리 20개.(독구는 Top Light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측됨.- 필자)

조선영화사(일제 어용영화사가 아닌 민간영화사. 사장은 최남주.- 필자) 시절에는 한 작품에 대강 돈 천원이면 했죠. 그 무렵에 제작비가 <춘향전> 할 때 1300원 들었구. 그땐 원작료가 없었을 거예요. 사례는 했겠지만. 감독하고 카메라하고 아마 칠팔십원 됐을 게요. 조명기사며 나머지는 고걸 비례하면 나오죠.

각본은 대개 서로가 모여 앉아 ‘오늘 무슨 영화를 하자, 그럼 이렇게 이렇게 하자’ 한 것이 시나리오가 된 거야. 시나리오 값이 없지. 주연배우는 돈이 되면 용돈 얻어 가는 거구. 요리집이나 기생집에서 인력거 가져오면 인력거 타구 가구. 필름은 한 작품당 10,000자 내지 8,000자 정도, 피트당 3전. 프린트는 많이 할 때 한 서너개 했지. 대강 하나밖에 안 했어. 그것도 누가 와서 돈 주면 해주지 안 했어요. 지금은 A프린트 B프린트 있지만, 그때야 화면이 어떻게 됐든 그냥 나오기만 하면 극장에 갖다 붙였으니까.

조명기사 임금은 여기 와서 첨에 <무정>(1939)이 한 100원을 줬고, 고담에는 140원. 선전비는 딴 거에 비해 많이 들었을 겁니다. 전문이 아니니깐 모르지만 가만히 보면 오늘은 어느 신문사, 오늘은 또 어느 신문사 뭐 이러구 하기 때문에 윤곽적으로 계산하면 젤 많이 든 것 같아요.

해방 되니까 사단법인 조선영화주식회사(일제가 군국주의가 발호하던 시기에 만든 관제 영화사. 이규환 편 참조 ―필자) 다나카 사보루(田中三郞) 사장이 나를 불러요. “이걸 맡아 주시오.” 내가 이걸 거절했죠. 남대문 밖에 촬영소 큰 광이 둘, 을지로4가에 또 광이 있었거든요. 원효로에도 있고. “어휴! 맡을 수 없소.” 그 사람은 시간이 급하니까 그냥 갔어요. 근데 암만 해두 안 되겠어요. 그래서 내가 운영위원을 맨들었어요. 그래서 ‘대한영화사’(1948년- 필자)가 건설됐지. 한쪽은 서울영화사(1948년- 필자)가 되고, 하나는 그대로 조선영화사가 유지돼서 나중에 대한영화사로(합쳐졌고). 여러 사람 만나서 얘길 들어보시면 거짓말 같이 똑같이 맞아 들어가요.(대화는 별다른 맺음말 없이 여기에서 중단되어 있다.- 필자)

정리 안선주/ 중앙대학교 영화학과·이영일출판프로젝트 연구원 babtong80@hanmail.net이 기록은 고 이영일 선생이 남긴 귀중한 자료인 원로영화인 녹취테이프를 소장 영화학도들이 풀어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