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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다 괜찮아
2001-10-17

`주변`에 대한 따뜻하고 핍진한 세밀화

● 사랑스럽고 애잔한 소품처럼 보이는 <고양이를 부탁해>(감독 정재은)는 기실 2천년대 한국영화계에 중요한 감독이 등장했음을 알리는 놀라운 작품이다. 학생 시절에 만든 두개의 단편영화를 통해 주목받았고 충무로에서 단 한편의 연출부 수업을 거친 것 이외에 뚜렷하게 알려진 영화 경력이 없는 젊은 여성감독의 데뷔작이 이런 수준으로 나오리라고는, 정직하게 말하자면, 예상하지 못했다.

제일 신기했던 사실은 서른을 이미 넘긴 감독이 스무살 시절을 어떻게 저리도 잘 기억하고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꽃도 아닌 봉오리도 아닌 아이/청소년/성인(스무살은 부를 만한 명칭조차 불분명하다)에 대해서 그동안 어떤 한국영화도 이런 방식으로 주목해주지 않았다. 단편 <도형일기>의 어린아이들, <둘의 밤>의 고등학생들에 이어 <고양이를 부탁해>의 스무살까지, 어찌 보면 정재은 감독은 비상하게 예민한 감수성으로 경험하고 기억한 성장기의 매듭들을 영화 속에 차례로 풀어내려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억과 관찰을 결합시켜 복원해낸 정재은의 아이들은, 그다지 훌륭하지도 현명하지도 않지만 나름대로 야심도 있고 자존심도 있고 선한 의지도 가졌을 세상의 모든 스무살에 말을 건다. 너의 집은 너에게 결코 평화가 아니었지? 도리어 고통 아니었니? 네가 거리로 처음 나섰을 때 너를 몰아치던 세상의 겨울바람은 얼마나 차가웠니?

그리고 그 아이들이 속삭이는 각자의 집 이야기를 다정하게 들어준다. 태희(배두나)네는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지만 연민이 많고 가슴이 열려 있는 너를 품어 안기엔 너무나 모자라구나. 혜주(이요원)네 가정은 불화 끝에 깨져버렸고, 너는 휘황찬란한 서울에 치솟아 있는 증권사 건물처럼 공중에 높이 떠 있는 집을 갖고 싶은 게로구나. 지영(옥지영)이가 철이 들었을 때 이미 너의 집은 무너져 있었어. 지붕이 꺼져 내리는 오막살이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잘살아보고 싶었겠지만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저 노인들이 사라져버리면 좋겠어’라고 하루에도 수십번씩 되뇌는 것 외에 무엇이 있었겠어. 네가 경찰조사를 받을 때 입을 열지 못했던 것은 이런 너에 대한 스스로의 처벌이었지? 비류와 온조(이은실, 이은주)는 이방인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이 땅에서 살아남은 화교의 자손답게 길거리 한복판에라도 뿌리를 내려박고 집을 이루려는, 열심히 돈 버는 유쾌한 아이들이지.

혜주는 높은 곳에 정착하려 하고, 비류와 온조는 지금 그 자리에 붙박히려 하고, 태희는 길 떠나고 싶어하고, 지영이는 부득불 떠나야만 한다. 그러나 감독은 이 아이들을 모두 다정하게 감싸안고 위무한다. 얘들아 괜찮아, 어떤 것도 다 괜찮아.

길을 나선 태희가 준비한 것은 탐조등, 책 보따리,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담배, 작은 옷가방과 약간의 돈이다. 지영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밤길에 앉아 있는 태희가 머리에 탐조등을 둘러맨 채로 책을 읽으며 담배를 피워 문 미장센은 평론가가 아닌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의 내 안에 들어 있던 스무살을 불러내었다. 기억의 블랙홀 속으로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그 어린 스무살이 되돌아와서 펑펑 울었다.경계를 묻는 지적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는 감독이 호소하고자 하는 대상의 감수성에 편안하고 열린 자세로 다가가면서도, 이미 몇몇 평자들이 지적했듯이 여러 층위에서 정교하게 직조된 대단히 지적인 영화다. 중심에 비해 주변은 초라하고 황막하지만 도리어 그 변방성과 파괴력으로 인해 새로운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개방된 공간으로 재해석되고, 마땅하게도 중심과 주변을 연계하는 경계의 중요성이 주목된다. 화면 안에서 야생동물과 애완동물의 경계에 있는 고양이, 집과 거리의 경계에 있는 창문 등이 강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천이라는 공간 역시 마찬가지 의미로 등장한다. 영화는 인천의 주변성을 여러모로 강조한다. “서울서 돼지갈비 먹고 냄새 풍기며 지하철 타고 되돌아가는” 베드타운격 배후도시인가 하면, 무너져내리는 지영의 집이 있는 가난한 동네도 있고, 사람들은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에게 무심하며, 공장과 고깃배만 잔뜩 가진 거친 지역일 수도 있다. 반면에 하늘로 바다로 동시에 열려 있는 개방적인 변방이기도 하다. 인천이 갖고 있는 국제 여객터미널과 국제공항은 역설적으로 한국이라는 주변부를 탈주하는 출구로 작용한다. 이러한 감독의 생각은 태희라는 캐릭터에 집약되어 나타난다.

정재은 감독은 또한 관념과 이미지, 추상적 사유와 구체적 디테일을 오가며 변환시키는 데에 남다른 노력과 재능을 보여준다. 태희와 지영이 마주치게 된 거지 노파는 현실에서 우연히 발견되는 존재일 수도 있지만, 길을 떠나도록 운명지어진 두 아이들이 갖고 있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시각적으로 현시한 것이기도 하다. 무너지는 가정이라는 추상적 관념을 무너지는 지붕이라는 구체적인 이미지로 시각화시키는 영화적 상상력, 자신의 철학적 진술을 고양이라는 환유적 사물로 잡아낸 점도 절묘하다. 로케이션 장소가 70여 군데에 이르렀다는 제작진의 비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인천과 서울의 공간 풍경(landscape)을 반복적으로 묘사하면서 대조하고 있는데 이 또한 중요한 이미지 언어로 기능한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휴대폰의 문자 메시지가 버스 창문이나 빌딩 등에 수시로 나타나고, 타자기를 또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글자가 책상 모퉁이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정경이다. 요즘 아이들의 생활상과 감수성을 담아내려는 실용적 목적이랄지, 혹시라도 영화가 지루할까봐 사소한 장난을 덧붙인 감독의 근심을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문제에 대한 감독의 꼼꼼하고 복잡한 태도로 미루어볼 때, 문자 텍스트를 화면의 전면에 부각시킨 것은 영화라는 압도적인 이미지 매체 속에 문자를 끌어들여 이미지-텍스트로 혼합해 보려는 시도로 읽힌다. 혼성적인 이미지-텍스트 문제는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도입되면서 전통적인 영상매체에 불러일으키고 있는 중요한 징후 가운데 하나로서, 디지털에 대한 감독의 관심이 시작되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삶의 핍진성에 충실한 영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정재은 감독을 한국영화계가 갖게 된 진정한 포스트 모더니스트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 작품의 특징 또한 여성적인 것 혹은 성장영화, 소수자영화, 예술영화 등 기존에 우리에게 알려진 어떤 개념으로 한정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이 모든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려 하는 어떤 힘, 감독 스스로 밝혔듯이 경계 위에 서서 그 경계들을 횡단하려는 의지가 또 하나의 동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로 인해 <고양이를 부탁해>는 기존의 한국영화들과 구별된다.

우선 이 영화는 한국의 주류 상업영화와 다르다. 충무로 흥행작들은 대개 멜로드라마의 관습에 바탕을 둔 뚜렷한 내러티브, 신파적인 기원을 갖는 감상적 페이소스, 그리고 최근에 강세를 보이는 TV 개그풍의 코미디와 풍자를 특징으로 한다(물론 이것들 역시 쉽사리 폄하하기보다는 진지하게 분석되어야 할 한국 대중영화의 특징일 것이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이런 요소 중에 어떤 것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주인공들이 벌이는 이야기 속에 관객을 휘어잡는가 하면, 웃기자고 만든 여느 영화만큼이나 종종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것이 캐릭터와 상황의 핍진성에 바탕을 둔 다채로운 감정의 결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에서 리얼리즘영화라 불러도 좋고 심지어 다큐멘터리적인 미덕에 가깝다고도 말할 수 있다.

반면 이 영화는 유사한 이유로 칭송을 받았던 기존의 문제작들과 다르다. 통상 리얼리즘영화라는 타이틀을 바치며 우리가 숭배했던 영화들은 한 시대를 휘어잡았던 인식론(설혹 비판적인 소수의 생각이었다 할지라도)을 풀어나가려는 감독의 초월적 의지 아래 모든 것을 종속시킨다. 역설적이게도 리얼리즘영화가 거대한 관념론의 영화였던 것이다. 반면 거대 담론을 조롱하며 작고 모호하고 유약한 일상의 세계를 탐색했던 영화들이 편집증적인 사담(私談)이나 소시민적 삶의 아이러니를 고백하는 감상문으로 빠지는 안타까움을 자주 보았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이러한 두 가지 경향 사이의 긴장을 잘 버텨내었다.

감독이 의도하는 지향점이 뚜렷하면서도 그것이 영화의 표면으로 과도하게 튀어나오지 않고 주인공들의 감수성에 묻혀서 진행된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이 영화에서는 등장인물의 고통에 확성기를 들이댐으로써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 어떠하다거나 인생이란 본디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설교하는 커다랗고 단조로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 때문에 감독이 도대체 뭔 말을 하자는 건지 아리송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태희와 지영은 놀라운 우정의 힘에 이끌려 드디어 함께 길을 떠나는데, 비행기를 타기 위해 몸을 돌린 뒤 무심하게 서로 다른 방향을 쳐다보는 두 아이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면서 화면은 잠시 정지된다. 이 쓸쓸한 새 출발의 이미지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도 덧붙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스무살 무렵에 함께 의지하며 인생의 길을 떠났던 그 많은 친구들이 지금 얼마나 다른 길 위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동시대의 한국영화 가운데 이처럼 성숙하고 독창적인 작품이 나왔다는 사실이 경이롭고, 그로부터 지적으로 설득당하고 정서적으로 위로받았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프로듀서를 중심으로 하는 충무로의 만만찮은 기획 시스템 속에서 ‘꼴통’ 소리를 들을 만큼 우직하게 자신의 색깔을 끌고 나온 감독이 첫 번째 시사회장에서 던진 공개적인 인사말은 뜻밖에도 간단한 우스개였다. “지금 충무로에는 <고양이를 부탁해2>가 만들어졌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칼을 산 뒤에 비행기를 탄 태희가 뉴욕의 세계무역센터를 들이받았다고 하네요.”

정재은 감독은 테러를 하기에는 너무나 균형잡힌 인간인 듯하지만, 우리 내면에 자리잡은 어두운 성채를 허물어뜨리고 녹여내기 위해서 당신의 마음속에 비행기라도 메다꽂겠다는 선포로 들려서 그저 웃어넘길 수 없는 섬뜩함을 느꼈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cwgo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