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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색 남자, 강릉 여자
2001-10-17

아저씨, <봄날은 간다>의 두 주인공에게서 옛친구를 떠올리다

● <봄날은 간다>에서 세월은 서울의 수색과 강릉을 잇는 길을 따라 흐른다. 수색은 내게 다소 낯선 곳이다. 내 발걸음이 수색에 닿아본 적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게도 수색에 대한 이미지는 있다. 중학교 동창들 덕이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홍은동에 있었는데, 그 학교에 함께 다니던 친구들 가운데 수색국민학교- 그 학교가 지금도 있다면, 요즘 말로는 수색초등학교겠지- 출신들이 몇 있었다. 나는 그 친구들과 어울리며 수색의 이미지를 얻었다. 그 이미지는 가난이었다. 그 친구들 가운데 즈런즈런한 분위기를 내뿜는 아이는 없었다. 수색은 아마 가난한 동네였던 모양이다. 그런 가난의 분위기가 나를 그 아이들과 가깝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나도 가난했으므로.

하긴, 그때는 모두가 가난했다. 수색만이 아니라 서울 전체가 가난했던 것 같다. 그 시절 내가 살던 마포를 돌이켜보면, 비좁은 방과 불결한 변소, 장터의 아귀다툼, 잦은 정전과 단수, 자리끼나 요강 속의 오줌까지 얼리는 겨울 윗목 같은 것이 대뜸 떠오른다. 그 시절의 부자 동네였던 종로쪽에서 온 친구들도, 몇몇 예외가 있기는 했으나, 대체로 가난했다. 요즘 텔레비전 드라마 속에서 고전적 부자들의 거처로 애용되는 가회동이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가난을 품고 있었는지를 나는 그 시절 그 동네 살던 친구 집에 놀러가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니, 수색과 가난을 잇는 내 연상은 그곳이 서울의 끝이라는 내 알량한 지리 지식의 부작용인 것 같기도 하다. 영화를 보니, 수색에는 아직도 그 가난이 얼마쯤 남아 있는 듯하다. 물론 1970년대 초의 가난과는 다르겠지만. 스크린 속의 수색은 지방 소읍 같았다. 30년 가까운 세월을 흘려보내며 서울이 겪은 그 어지러운 변화가 이 물빛 동네에는 인색하게 배분된 모양이다. 그걸 다행스럽다고 말하는 것은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일이겠지만, 영화 속의 수색이 나를 10대의 서울로 이끌며 내 가슴을 뭉클하게 한 것은 사실이다. 그 뭉클함의 한 자락은 달콤함이었다.

강릉 여자로 내가 처음 알게 된 사람은- 타지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신사임당이었다. 그러나 신사임당은 관념 속의 여자였다. 육신을 가진, 그래서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사람으로서 내가 처음 알게 된 강릉 여자는, <씨네21> 독자들이 아직 그 이름을 잊지 않았을, 조선희씨다. 나는 그녀를 1988년 초 안국동의 한겨레신문사 창간사무국에서 처음 만났다. 어쩌면 창간사무국이 아니라 그 부근 한국병원의 신체검사장에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에게서 받은 첫 인상은 가냘픔이었다. 물론 그녀의 외양이 내면을 배반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내가 정식 사원으로 <한겨레>에서 일한 기간은 6년이었는데, 조선희씨는 그 시절 가장 가까이 어울린 동료 가운데 하나였다. 자기주장이 강한- ‘자기주장이 강한’이라는 표현은 흔히 ‘이기적인’ 또는 ‘독선적인’이라는 말의 완곡어로 사용되지만, 나는 여기서 이 말을 그런 뜻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적어도 나보다는 덜 이기적이었고, 적어도 나보다 더 독선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니 여기서 ‘자기 주장이 강하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자기 주장이 강하다는 뜻이다- 여자여서, 나는 그 시절 그 친구에게 늘 얼마쯤 주눅이 든 채 살았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 일했던 시기를 회상하는 것은 즐겁다. <한겨레> 시절이 내게는 직업적 열정으로나 주위 사람들과의 우정으로나 가장 뜨거웠던 때였던 것 같다.

1991년의 첫 주말에 나는 조선희씨가 운전하는 차에 실려 속리산 법주사를 찾았다. 문학평론가 홍정선형이 선동해서 문인들과 기자들 몇이 어울린 나들이였다. 눈이 많이 온 날이었고, 운전면허를 딴 지 얼마 안 된 조선희씨의 차는 눈길 위에서 아슬아슬한 곡예를 펼치며 질금질금 전진했다. 눈오는 산사에서- 바로 <봄날은 간다>에 나오는, 그 눈오는 산사 풍경이었다- 밤도와 얘기를 나누면서, 나는 그녀의 조그마한 육체가 내장한 주름 많은 기억들과 낙관적 열정에 새삼 감탄했다.

<봄날은 간다>는 아름다운 영화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를 백안시하고 유럽을 청안시하는 미적 귀족들에게 이 가을날 찾아든 축복이다. 그림도 소리도 섬세하고, 이영애씨와 유지태씨의 연기도 익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왜 노골적으로 <스포츠조선> 선전을 해야 했는지 모르겠다. 작품이 섬세했던 만큼, 관객의 미감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스크린 속 광고판의 이물감은 외설스러울 만큼 도드라졌다(이 부분도 정말 같은 감독의 솜씨란 말인가?). 그것은 관객에게 무례한 일이라 할 만했고, 나 개인적으로도 모욕당한 느낌을 받았다. 왜 내가 관람료 7천원을 내고 한 회사의 광고용 영화를 봐야 하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그 광고판이 공영방송에 나온 것도 아니니 비윤리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또 그게 불쾌하면 영화를 안 보면 그만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딴은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내게도 그걸 봤을 때의 불쾌감을 털어놓음으로써, 아직 그 영화를 보지 않은 영화팬들의 판단을 도울 권리는 있다.고종석/ 소설가·<한국일보> 편집위원 aromach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