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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한국영화가 아니라 한국영화 `들` 이다”
2001-10-30

<고양이를 부탁해> <나비> 조기 종영문제, 다양성 확보 위해 배급 관행을 바꿔야 한다

<고양이를 부탁해>와 <나비>는 결국 기대함직한 소수의 관객조차 만나지 못하고 종영을 맞이할 것 같다. 앞으로도 작고 의미있는 영화들이 줄지어 있어, 많은 영화인들이 근심하고 있다. 이건 관객의 탓으로 돌릴 일이 아니다. 즉각적인 자극을 주지 않지만 오래 남는 영화들한텐 그들만의 배급 룰이 필요하다. 김소영 교수가 새로운 룰을 긴급제안한다. 편집자주

지금 한국영화 문화엔 이중의 자물쇠가 잠겨 있다. 첫 번째 자물쇠는 한국영화와 할리우드영화용이다. “문화적 종 다양성의 힘”이라는 슬로건으로 확장된 스크린쿼터 운동과 새로운 감독들과 기획자들 그리고 한국영화로 돌아온 관객 덕분에 이 첫 번째 자물쇠는 훌륭히 그 역할을 해내고 있다. 해방 이후 이제까지 한국영화시장을 독점해온 할리우드영화라는 불한당을 막아낸 것이다. 물론 이것도 최근의 일이며 거의 이변에 가까운 사건이다. 그런데 문제는 밖에선 잘 보이지 않는 두 번째 자물쇠다. 도대체 이 두 번째 문 안에 무엇이 있는가? 여기에는 재능있는 감독들, 기획자들 그리고 스탭들이 만들어낸 놀라운 영화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들은 도대체 어떻게 관객과 만날 수 있는가? 최근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 문승욱 감독의 <나비>의 상영과 관계된 양상은 이제 한국영화의 외연적 확장과 더불어 내연의 확장, 질적인 풍요를 위해 우리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할 시점이 왔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한국영화를 위한 시장확대는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보고 이제 한국영화‘들’의 생존을 위한 다원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이 모색되어야 할 시기다. 현재의 상영구조에선 부익부 빈익빈식의 이윤 몰아주기가 확대 재생산될 위험이 크다. 엄청난 홍보 마케팅과 멀티플렉스 극장을 비롯한 상영관에 동시적으로 와이드 릴리스 하는 데 필요한 프린트 수를 채울 수 있는 자본을 동원한 영화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다. 말하자면 이러한 와이드 릴리스는 관객이나 평론가들의 의견이나 평가가 영화의 흥행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하면서 초반 시장을 독점하는 그야말로 치고 빠지는 식의 흥행 방식이다. 미국의 블록버스터들이 바로 이 전략을 사용했다.

또 이와는 정반대로 그 진가를 알기 위해 어느 정도 뜸들일 시간이 필요한 영화들은 미처 입소문이 나기도 전에 황급히 극장에서 내려진다. 아마도 누구나 “좋다고 해서 보러 갔더니 이미 극장에선 다른 영화를 하고 있더라”라는 말을 이즈음 부쩍 자주 들었을 것이다. 주말 좌석점유률이 나오자마자 작은 영화들은 내려가고 블록버스터들이 그 자리를 밀고 들어간다. 하지만 조폭으로 알려진 덩치들이 등장하는 덩치 큰 영화들이 동종교배식으로 급속히 증식하고 있으니 이런 식이라면 한국영화의 신선함에 대한 관객의 평가가 얼마나 갈지도 의문이다.

장미빛 환상으로 끝난 멀티플렉스의 꿈

사려깊은 한국영화들만이 아니다. 유사 할리우드 양식을 취하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와 할리우드영화들을 제외한 이른바 예술영화들이나 대안영화들이 상영될 수 있는 기회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몇년 전부터 해외영화제나 국내의 영화제들이 일종의 공공영역으로 기능하면서, 시장에서 쉽게 주목받지 못할 영화들을 관객에게 소개해왔다. 그러나 이제 그 역할은 정확히 거기서 그칠 공산이 크다. 문승욱 감독의 <나비>가 그 한 예가 될 수 있다. 영화 관계자들은 잘 알지만 로카르노영화제는 상당히 선택의 기준이 까다롭고 독특한 영화제다.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과 박광수 감독의 영화들이 바로 로카르노에서 수상했다. 이제까지 국제영화제로부터의 그러한 승인은 관심있는 관객을 극장에 모을 수 있는 꽤 괜찮은 초청장 역할을 했다. 그러나 현 시점에선 국제영화제만이 아니라 영화 전문 기자들 그리고 평론가들의 진심어린 옹호와 지원도 멀티플렉스가 주도하는 좌석점유률이라는 숫자와의 싸움에서 고지를 점하고 있진 않다.

서울에만 200개라는 그 많은 스크린에 다양한 영화들이 상영되리라고 예상하기도 했지만 결과는 정반대다. 성수기에도 그 많은 스크린들 위에서 돌아가는 영화들은 단 8편뿐이다. <씨네21> 특집에 나온 기사 내용대로 “출범 초기 다종다기한 영화들을 볼 수 있다고 선전했던 멀티플렉스의 장밋빛 약속은 확실히 물거품이 됐다.”

정말 사태는 심각하다. 재능과 열정을 가지고 한국영화에 헌신하는 그 수많은 감독들과 스탭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다양한 영화들을 볼 권리를 가진 관객은 갑자기 외형적 풍요 속에서 선택권을 빼앗긴 셈이다. 질적인 빈곤에의 동참을 강요당하고 있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상영에 얽힌 이야기는 예시적이다. 주말 좌석점유률이 떨어지자 이 영화는 곧 스크린을 <킬러들의 수다>와 <조폭 마누라>에 양도해야 했다. 관객의 ‘고양이 살리기’ 운동이 있었지만 <고양이를 부탁해>는 10월28일이면 서울에 있는 상영관에선 막을 내린다. 10월24일까지 서울에서 이 영화를 본 사람은 2만여명 정도다. 신문이나 영화 전문지들에 실린 호의적인 평들은 물론이고 개인적으로도 이 영화에 대한 주변의 칭찬들을 많이 들었다. 여성학을 가르치는 한 교수는 울었다고 했다(하지만 애석하게도 극장 안에는 그녀와 함께 감응할 관객이 없었다). 또 김영옥씨는 이렇게 썼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놀라운 출발은 희망찬 예언도 많고 의혹도 많은 글로벌시대를 이제 본격적으로 살아가게 될 세대의 오늘과 내일을 덤덤하게 조명하는, 그러나 꽤 단단한 성찰적 핵을 숨기고 있는 ‘사건’이다.”(<여성신문>)

영화는 보여질, 관객은 볼 권리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사건’을 어떻게 관객에게 그야말로 널리 알려 보게 하는가 하는 문제다. 이젠 거의 ‘옛날 옛적에’ 수준으로 들리지만 몇년까지만 해도 이렇게 호평을 받은 영화의 경우 서울관객 수가 4만명에서 7만명까지는 됐다. 이제까지 성공적이었던 스크린쿼터제가 영화적 종의 다양성을 구호로 걸고 있는 만큼 이제 명실상부한 한국영화‘들’의 다원화를 위해 스크린쿼터 의무조항에 한국영화 한편당 최소한 1주일이나 열흘의 상영일수를 보장하는 항목을 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개봉 당일과 그 며칠의 좌석점유율에 휘둘리지 않고 관객 스스로가 그 영화를 판단하고 주변에 권유할 만한 적절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제도적 장치를 지키지 않았을 때의 불이익이 지켰을 때의 이익보다 크도록 못 박아야 한다. 그래서 <나비>나 <고양이를 부탁해>와 같은 작지만 미래지향적인 영화들이 사려깊은 관객의 입소문에 의해 잔물결처럼 퍼져나가 파도로 돌아올 시간을 갖자는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은 위의 두 영화에만 국한된 근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나 <꽃섬>처럼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영화들을 보고 싶고 알리고 싶은 마음이 나만의 것은 아니라는 믿음 때문이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대한 문제제기

그렇다면 왜 우리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서라도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는 창들을 만들어야 하는가?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최근 동남아지역의 ‘한류’와 맞물려 세계화시대 한국인에게 힘을 몰아주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 힘의 정체는 무엇인가? 말하자면 그 기반은 무엇이며 도대체 우리를 어느 곳으로 데려가고 있는가?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한국시장에서 할리우드를 제압하고 창궐하는 현재의 상황은 역설적이다. 한국의 전반적인 경제와 정치상황은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사실 세계화는 미국화와 동의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가 강화하는 문화적 민족주의와 시장에서의 몇번의 성공은, 순간적으로 번쩍하면서 눈을 멀게 하는 광학효과를 생산한다. 세계화를 강요당하는 비서구의 한 국가가 서구를 적극적으로 모방해 아시아라는 지역 단위의 맹주가 되기를 원할 때, 즉 힘없는 자가 힘을 가지려 할 때 욕망과 불안의 동학은 매우 복잡해진다. 글로벌 자본주의 하의 한국의 후기 신식민지적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과 불안의 동학이 폭발적으로 시각화되는 지점 중 하나가 한국형 블록버스터이다.한국형 블록버스터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모방하는 호방한 짝패다. 그것은 1920년대 이후 배급, 상영면에서 전 지구화를 관철한 할리우드의 형식을 차용하면서, 영화적 재료를 한국적인 것 심지어 민족적인 것처럼 제시한다. 할리우드라는 공식적(official) 보편성이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유령적(spectral) 보편성으로 분할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절대로 한국적인 것이 아니다. 할리우드의 유령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령적 혹은 유사 보편성에 의해 재현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소수 집단은 인간으로 인지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조폭과 같은 불한당 남성집단이 대표적 한국 집단이 되고 그 나머지는 영화적으로 재현될 필요도 또 보아줄 필요도 없는 비인간 군상으로 남겨진다.

멀티플렉스라는 배급구조의 변화와 더불어 할리우드를 모방하고 번안하는 그러한 유령적 보편성이 생산적인 소수의 목소리, 다양성의 스펙트럼을 죽이고 있다. 영화인들만이 아니라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스크린쿼터와 한국영화가 진정으로 다양한 문화를 생산해내는 세계적 장들(시장만이 장이 아니다)로 도약하기 위해선 이제 제도적, 인식론적 차원의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김소영/ 영상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