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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부산이 선물한 두편의 영화

제1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장률 감독의 <경계>와 타이영화 <원더풀 타운>

바다의 빛을 보며 아침을 맞는 것은 축복이다. 그리고 이후 밤까지 이어지는 영화의 빛들. 10월4일에서 12일까지 부산국제영화제는 이 두 가지 빛의 스펙트럼 속에서 열린다. 올해도 여느 해처럼 하루 4편가량의 영화를 보고, 미드나잇 스페셜을 들르기도 한다.

최근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감독 중 한 사람이 한국계 중국 감독 장률이라 <경계>를 보러 갔다. 그의 영화는 ‘한국영화의 오늘’에서 상영되었다. 한국 영화계가 장률이나 <>의 최양일과 같은 중국이나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계 감독들을 수용하는 것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경계>는 한국, 몽골, 프랑스 3개국이 공동 참여한 영화이며 언어도 한국어(북한어)와 몽골어가 공존하는 작품이니 그 자체가 기존의 ‘한국영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이다.

그 <경계>의 경계에 외몽골 사막의 풍경이 서 있다. 건조한 아름다움이다. 사막화되어가는 황폐한 스텝, 초원에 한 남자 항가이(바트을지)가 살고 있다. 아내와 딸이 있다. 항가이는 아내와 어떤 언어적 수사, 육체적 전희가 없는 섹스를 나눈다. 또 말과 염소 등의 가축을 키운다. 마유를 끓여 마시고 가끔 보드카도 마신다. 무엇보다도 그의 과묵하고 단호한 열정은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에 바쳐진다. 그러나 딸이 청력을 잃을 형편이다. 아내는 도시, 울란바토르로 가자고 한다. 남편이 거절하자 그녀는 나무를 심는 그의 헛된 노력을 폄하한다. 그리고 딸을 데리고 도시로 떠난다.

그 빈자리로 정확히 두 사람이 걸어들어온다. 탈북자 모자다. 그들은 장률 감독의 전작인 <망종>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배우는 바뀌었다. 최순희(서정)와 창호(신동호)다. 배우 서정은 얼굴의 표정이나 대사의 뉘앙스를 보여주는 클로즈업이나 미디움 숏이 없고, 대사가 통하지 않는 이 영화에서 예절을 나타내는 몸의 동작을 절제되게 기호화해 적절하게 사용한다. 그녀는 깍듯이 머리를 숙이고 손을 조아려 하룻밤 묵기를 청한다.

아들 창호가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항가이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되어 최순희는 예정보다 오래 이곳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항가이의 일상의 노동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간다. 연료를 위해 말똥을 줍고, 마유를 끓이고 나무를 심는 일을 돕는다. 사람들이 항가이와 술을 마시면, 안주를 만들어 내가기도 한다. 와중에 드러나는 사실은 두만강을 건너다 남편이 총에 맞아 죽었고, 최순희의 계획은 아들과 남한에 가는 것이다.

성(性)을 매개로 나와 타자의 경계를 사유하는 <경계>

사막처럼 모래와 같은 단일 재질로 의미화를 이루는 이 영화는 그러나 그 위에 만들어지는 수많은 모래언덕들과 선들만큼이나 다중적이고 다층적이다. 탈북자와 몽골인, 탈출과 유목이 다루어지는 것이니만큼 국가와 지리적 경계가 만들어내는 삶의 조건, 심리적 경계에 대한 성찰인 것은 영화적 재료나 제목에서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바다. 위와 더불어 내가 이 영화에서 흥미롭게 생각했던 것은 섹스 행위를 둘러싼 어떤 경계와 경배, 일상과 환상의 문제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영화는 몽골의 풍경과 더불어 항가이와 그의 아내의 성행위에서 시작한다. 항가이는 아내와 딸이 남기고 간 자리로 걸어들어온 이들을 손님이면서도 식구처럼 맞이한다. 문제는 최순희가 그에게 연민을 표시하는 몸짓을 보내자 항가이가 그것을 성행위를 시작할 수 있는 기호로 잘못 받아들이는 것이다. 저항하던 최순희의 행동이 흥미롭다. 그녀는 항가이의 칼을 빼어든다. 그리고 가축 우리로 들어가 염소를 죽여 끌고 나온다. 항가이는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나는 이러한 일련의 미수 행위와 완수된 행동의 시퀀스에 드러나는 윤리성이 장률 감독 영화의 무딘 깊이와 민감한 세부라고 생각한다. 초원의 미래를 생각하는 윤리적 인간인 항가이는 최순희라는 여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잘못된 성행위을 저지를 뻔한다. 그러나 최순희는 아들 창호와 함께 그에게 삶을 빚지고 있고 그의 보살핌을 받은 만큼 그의 뜻에 반하는 자신의 강한 의지를 항가이가 아닌 그의 염소를 죽이는 것으로 표현한다. 좀 평상적으로 상상하자면 이 장면은 순희가 항가이의 어느 부위를 찌르려고 하다가 실패하거나 아니면 찌르거나 항가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희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거나 못한다거나로 끝났을 것이다. 이 장면은 어떤 우회로를 거쳐(염소가 희생된 것은 안타깝지만), 순희가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히되 자신의 은인에게 어떤 예의를 갖춘다는 점이 젠더 정치성의 입장으로 보자면 감독의 진전된 사유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이와 상반되는 것이 항가이와 말을 타고 초원을 달려 어딘가로 가고 있는 여자와의 장면이다. 하룻밤 묵을 수 있겠느냐고 청한 뒤 이 초원녀는 사랑의 노래를 항가이에게 불러주고 둘은 모래언덕 속으로 사라지고 우리는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는 그들을 본다. 다음날 그녀는 항가이와 악수를 주고 받고 가던 길을 간다. 물론 이 장면은 유목민에 대한 우리의 판타지로 볼 수 있는 부분이 많지만 영화에서는 강력하고 해방적이다.

영화 <경계>가 드러내는 뚜렷한 정치적 관심은 탈북,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는 유목민들이 처한 현실이지만 이 영화의 무의식 중 하나는 성을 매개로 숨겨지고 드러나는 나와 타자의 경계와 탈경계들이다.

타이 마을의 폐쇄성을 아찔하게 그려낸 <원더풀 타운>

아시아영화들 중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영화 중 하나는 추이즈언의 <세상에서 가장 큰 집을 가진 남자>로, 중국 퀴어영화의 전선에 서 있는 이 감독의 명성에 전혀 어울리지 않고 최근 영화학교 학생들의 작품보다도 생각이 모자라는 것이었다. 철학적 영상에세이라고 하는데 철학도 영상도 에세이도 없는 비디오이며 여성혐오증마저 보였다.

두편의 다른 실망스러운 작품은 뉴 커런츠의 <신 인간 개>로 대만의 여성감독 첸싱잉이 만들었는데, 원주민 에피소드도 등장하고 구원의 이야기도 다루지만 핵심은 중산층 부부의 재결합으로 정치적 제스처, 플롯적 꼬임만 보인다. 하지만 다른 영화제들에서는 좋아하는 눈치다.

타이 감독 펜엑 라타나루앙의 <플로이>는 필름 자체의 색감을 처리한 것이나 실내에서 배우들의 배치, 연기는 감독의 재능을 느끼게 해주지만 역시 중년 부부의 재결합에 영화의 모든 장점들을 사용해버리고 만다. 그 다채로운 도시 방콕은 색채없는 배경으로만 등장한다. <플로이>가 그려내는 호텔의 메이드와 웨이터의 섹스장면은 그 모든 체위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어떤 에로티시즘도 주지 않는다. 흥미로운 일이다. 영화사 포티시모가 개입한 동남아시아영화의 특성인 것 같기도 하고….

올해 아시아영화 중 가장 진담이며 진경인 영화는 신인감독 아딧야 아사랏의 <원더풀 타운>이다. 쓰나미가 스쳐간 타쿠아파라는 타이의 남부가 배경인 이 작품에서 잠시 동안 숨을 멎게 만든 장면은 여관을 운영하고 있는 타이 중국계 여성인 ‘나’(Na)가 제사에 참가하는 장면이다. 아마도 유교적인 무엇과 다른 무엇이 결합한 듯이 보이는 이 제사장면에서 ‘나’는 향을 태우고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은 유령처럼 포커스 아웃으로 처리되어 있다. 이전에 ‘나’는 방콕에서 이 마을로 들어온 한 건축가와 다정한 관계를 갖는데, 이 제사장면은 어떤 탈출도 가능하지 않은 이 남부 마을의 폐쇄성을 아찔하게 그려내고 있다. 또 영화의 후반부는 그것을 극적이고 미니멀하게 재현해낸다. 부산국제영화제의 후반제작지원을 받은 이 영화는 HD로 찍고 그것을 다시 필름으로 옮겼는데, 질식할 것 같은 마을의 풍속과 쓰나미의 습격을 받은 그러나 여전히 빛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미묘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플로이>에서 고이치 쉬미주의 음악은 좋치 않았으나 여기선 기타 선율이 정확하게 이 마을에 팽배한 자연과 인간의 폭력성과 여릿함을 담아내고 있다. 그러니 난, <원더풀 타운>과 <경계>를 마음에 담고 부산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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