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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신파의 눈물이 낳은 이란성 쌍둥이

다른 듯 같은 멜로영화, 곽경택의 <사랑>과 허진호의 <행복>

김소영, 허문영 평론가 사이에 마련된 정성일 평론가의 자리에 별안간 성은 같으나 이름이 다른 자가 등장한 것에 독자들이 놀라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가 숨겨놓은 필명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니 잠시 진정하시길 빈다. 소인, 잠시 지나가는 객일 뿐이다.

가끔 이견이 없지 않았으나 평소 정성일의 글에 취해 사는 독자 중 한 사람으로서 그의 자리에서 나의 소견을 쓰는 것이 과연 그의 통찰을 읽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가 돌아올 때까지 누군가가 잠시 이 자리를 맡아야만 하고 우연히 그게 나의 역할이 된 것이라면 한 가지 다짐은 하고 싶다. 김소영, 허문영 두 훌륭한 평론가가 사유의 숨을 더 깊게 쉴 수 있도록 한주의 시간을 벌어주는 징검다리로 혹은 덧붙여 가끔은 쓸모있는 보론과 이견도 제시할 줄 아는 첨언자로 노력하며 정성일 평론가를 애타게 기다리고자 한다. 갈수록 건기와 우기만 있다는 사계의 무딤 속에서 가을용 멜로 장르로 우리를 찾은 두편의 한국영화에 관해 몇 마디를 덧붙이는 것으로 객잔에서의 첫 번째 영화의 잔을 들고자 한다.

<사랑>과 <행복>을 같이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

나는 곽경택의 <사랑>에 대해 적의를 보이면서 허진호의 <행복>에 대해 전적인 호감을 표하는 평의 기준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아니, 잘 모르겠다는 건 실은 과장이고, 알지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물론 내가 보기에도 <사랑>이 투박하고 <행복>은 고운 결을 가진 영화다. 그것만으로도 단순한 비교 우위의 기술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때 허진호의 영화적 멈춤 혹은 후퇴를 함께 지적하지 않는 건 의아한 일이다. 소수의 평자만이 그걸 짚어낸다. 물론 곽경택의 영화는 <친구>에서 더 나아진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사나이들의 감성이 이제 질릴 만하다. 하지만, 두 영화가 완벽하게 별개의 종류라고 믿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두 영화를 같이 말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영화가 우위에 있다는 걸 철저히 입증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둘을 같이 생각하는 것, 그것 자체가 중요하다. 혹은 <행복>을 말하기 위해 <사랑>을 말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두 영화는 통속 멜로영화라는 장르의 두 가지 어떤 양태로서 또는 거기 개입한 강한 신파극의 기운에 의해 맺어진 두개의 영화로서 접속, 교차, 보완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어떻게 조응하고 있는지를 보려는 것이다.

사랑과 행복이란 말은 거대한 추상이다. 이 두개의 절대적 추상을 제목으로 지은 것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두 영화를 보고나니 제목을 바꿔 불러도 무방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사랑이 있고 수없는 행복이 있지만 <사랑>은 <행복>이 이루지 못한 사랑을 완성하고 <행복>은 <사랑>이 선택한 행복을 꿈꾸다 실패하는 이야기다. “우리, 불행이 쫓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치자고 <사랑>의 인호(주진모)는 미주(박시연)에게 간절히 청한다. “나가줘 영수씨. 부탁이야. 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라고 <행복>의 은희(임수정)는 영수(황정민)에게 부탁한다. 차이가 있다면 인호는 자신이 한 그 말을 믿고 실천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만, 은희는 그 말을 뱉어 자기의 진심을 배반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회장이 인호를 불러 세워 “인호야, 여자는 순간이다”라고 설득할 때 인호가 “저는 아닙니다, 어르신”이라고 말하는 건 당연해 보인다. “네가 먼저 날 보고 떠나라는 말 좀 해달라”고 술에 취해 빌었던 영수에게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은희는 정말 그렇게 말해준다. <사랑>의 인호와 미주는 결국 동반의 선택을 하지만, 병이 낫고 도시가 유혹하자 <행복>의 영수는 은희를 버린다. ‘<사랑>은 <행복>이 이루지 못한 사랑을 완성하고 <행복>은 <사랑>이 선택한 행복을 꿈꾸다 실패하는 이야기’라는 앞의 말을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되돌아서 생각해볼 때 이렇게나 귀결이 다른 두쌍이 실은 매우 유사한 첫 만남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곽경택의 남자들 vs 허진호의 여자들

오래전 초등학교 꼬마였을 때 이삿짐 용달차를 타고 동네 어귀로 들어서던 인호는 차 안에서 미주를 보게 되고 그때 영화는 느린 화면으로 미주를 보는 인호의 시점을 보여줌으로써 인호가 그 뒤 미주를 평생 사랑하게 될 것을 예고한다. 인호는 첫눈에 미주를 사랑했다. 간경변이라는 병을 얻어 요양원으로 들어가던 영수가 은희를 만났을 때 영수는 그녀의 수수한 행색을 보고 시골 가게 아주머니라고 착각했으며, 아닌 줄 알고 나서도 그냥 놀림삼아 옆에 가까이 다가가 앉으려는 짓궂은 장난을 쳐본다. 영수는 처음부터 은희가 자기의 운명이라고 느끼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은희는 그렇지 않았다. 영수의 장난이 거슬려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그때 은희의 행동을 담은 한숏을 눈여겨보아야만 한다. 은희는 뒤돌아서 작은 손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정리한다. 은희는 첫눈에 그가 마음에 들었고 그에게 잘 보이고 싶었으며 보자마자 설&#47132;다.

<사랑>의 인호와 <행복>의 은희가 개인적으로는 같은 종류의 사람으로 보인다. 미처 인호와 은희를 같이 두고 관계짓지 못하는 건 인물과 그들의 선택과 거기 따르는 운명의 갈림에 방점을 두지 않고 습관처럼 성별의 구분에 따라 인호와 영수를, 은희와 미주를 같은 입지에 놓고 보기 때문에 그렇다. 물론 곽경택 영화의 남자들은 일관된 파멸의 운명 혹은 파멸을 통한 인정투쟁(<친구>), 승리에의 좌절(<챔피언>), 피학적 혹은 너무 피학적이어서 우스워지는 결투(<똥개>), 너무 의연하게 현실의 조건을 넘어서는 바람에 도리어 어리둥절해지는 교감(<태풍>)을 통과한다. 곽경택 영화의 여자들은 그 사이에 사라지거나 허상의 정박지로 남곤 한다. 그동안 지적되어온 내용이다. 분명한 건 곽경택 영화의 남자들은 삶에서는 깡패에 불과하거나 폭력의 맛을 아는 자들이고, 동성간의 관계에서는 지나친 혈맹주의자이지만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기사’(騎士)들이라는 점이다. 곽경택의 사랑은 언제나 남자들의 사랑이며 궁정식 사랑이다.

그에 반해 허진호 영화의 여자들이 보내는 연애의 제스처는 실용적이다. 그것이 어떤 의미로 통용된다 할지라도 <행복> 이전까지 그래왔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정원(한석규)에게 다림(심은하)은 주말에 할 일이 없고 같이 놀 사람이 없다며 같이 놀러 갈 것을 은근히 제안한다. 그리고 성공한다. <봄날은 간다>에서 은수(이영애)는 라면 먹고 가라고 상우(유지태)를 잡더니 라면을 끓이다 말고 “자고 갈래요?”라고 한발 더 나아간다. 상우는 자고 간다. 그 말의 의미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외출>에서 서영(손예진)은 “우리 사귈래요? 복수하게”라고 인수(배용준)에게 먼저 말하고 정말 그렇게 된다. 허진호 영화의 여자들은 연애의 시작에 있어 거의 먼저 자기 진심을 드러내며 또한 성취한다. 실용적이라는 건 상황에 민감하며 목적을 이룰 줄 알지만, 그다지 헌신적이지는 않다는 뜻이 포함된다.

인호의 주먹 vs 은희의 거울

솔직히 말하면 영수와 미주는 인호와 은희에 비해 현저히 그려지는 바가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행복>에서 영수의 이야기에 덜 공감이 가거나 혹은 영수보다 은희의 과거가 더 궁금하다. 영화가 그렇게 그려놓았다. 그리고 <사랑>에서 미주는 인수를 아는 만큼의 십분의 일도 모른다는 느낌이다. 때때로 아예 없는 사람처럼 취급되고 있다. 그것 역시 영화의 요구다. 이건 곽경택과 허진호가 좀더 진한 멜로영화를 성사시키기 위해 고민하다가 닿은 공통의 인물론일 것이다. 곽경택은 자기의 길을 가는 중이지만 허진호는 자기의 길에서 잠시 비껴나 있다. 허진호는 인물의 어느 한쪽에만 성정을 심어준 적이 없다. 차라리 그의 영화는 사랑을 다루는 데 있어 중성의 영화에 가까운 편이었고 그래서 매혹적이었다. 누군가는 영수나 미주가 인물로서 정말 존재감이 없는 것이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행복>에서 영수는 은희를 투사하지 않고는 이해되지 않으며 <사랑>에서 미주는 인호의 시야에 포착될 때에만 존재한다. 이런 인물론이 작용하고 있다는 추측에 확신을 심어주는 어떤 행위가 있다. 인호와 은희에게는, 영수와 미주에게는 없는 각각 자신들만의 절대적 행위가 있다.

<사랑>에서 유년 시절 인호가 처음 미주에게 사랑을 고백한 방식이 그녀의 뒷통수에 장난을 걸던 아이와의 주먹질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인호는 처음부터 몸으로 표현하며 싸웠고 그 싸움은 미주를 지키는 인호의 평생의 방식이다. 곽경택의 영화에서 폭력이란 상시적인 것이지만, 이 영화에서 모든 폭력은 미주를 만나기 위한 것이고 그녀를 지키기 위한 것으로 수렴된다. 인호는 미주와 관계된 일이 아닌 이상 폭력을 휘두르는 법이 많지 않다. 자신의 보스인 유회장을 만나게 되는 것이 싸움실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지만, 유회장을 만나야 했던 이유가 미주를 만나기 위함이었음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조직 폭력배들이 미주 어머니의 놀음빚 대신 미주를 팔아넘기려고 할 때 인호는 다시 맨몸으로 싸워 미주를 지키고 감옥에 간다. 그리고 그 몸이 벌이는 싸움의 행위, 끝내 폭력으로도 버틸 수 없는 순간이 오자 죽음으로 마감한다. 미주는 구출되어야 할 때만 존재하고 영화는 언제나 그걸 준비하며 살아가는 인호의 이야기다. <사랑>에서 폭력은 인호의 피 묻은 구애 행위다.

<행복>의 은희에게는 더 중요하고 반복적인 행위가 있다. 은희는 거울을 보는 여자다. 허진호의 영화에서 어떤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그녀가 어딘가에 비친 자신이 되거나 그것을 바라보는 때가 있다. <외출>에서 벽에 눈덩이를 던지고 있는 인수를 내려다보던 서영은 유리창에 반사된 자신의 미소를 갑자기 우리에게 보여줬으며, 그때 우리는 잠시 놀랐으며, 숏이 바뀌면 서영은 이미 가볍게 건물 아래로 내려가 다정하게 인수 옆에 서 있다. 그 다음 장면, 서영은 인수와의 술자리에서 마음을 털어놓는다.

은희와 영수가 처음 만났을 때 이미 말한 것처럼 은희는 손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이러고 말았으면 이 장면의 의미는 단순해졌을 것이다. 은희가 영수를 운명이라고 생각한 순간이라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은희는 얼마 뒤 두 번째 거울을 본다. 자신의 방에 있는 긴 거울을 통해 두 번째 자신을 들여다 볼 때 자신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해도 되는 사람인지 스스로 묻고 있는 중이다. 그 다음 숏에서 은희는 코에 호스를 꼽고 힘겹게 숨을 헐떡이며 자가 치료 중이다. 이 숏에 의해 앞장면의 거울 보기는 ‘이렇게 몸이 성치 않은 내가 같은 상황의 사람과 사랑에 빠져도 되는 것인지’ 고심하는 장면으로 도치된다.

은희의 거울보기는 멈추지 않으며 이제 망설임을 넘어 어떤 선택의 순간이 된다. 한밤에 과일을 들고 영수의 방을 찾았던 은희는 그 방에서 귀신을 본 적 있다는 농담을 던지고 돌아가려 한다. 영수가 뒤이어 “은희씨 갔어요? 나 진짜 무서워요”라고 무언가 육체의 요청이 분명한 애교를 부릴 때도 은희는 다름 아니라 벽에 걸려 있는 거울을 문득 들여다본다. 은희는 영수의 요청을 알고 있고 그와 함께할 잠자리를 거울을 보며 결심한다. 그러므로 그 다음 숏, 침대에 누워 있는 두 사람은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호응한다. <행복>에서 은희가 거울을 보는 것은 징표이자 신호이며 자문을 하는 과정이고 선택을 내리는 찰나가 된다.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우리들을 이끄는 감정의 유도다.

<행복>에는 ‘거울의 삼각관계’라고 이름 붙이고 싶은 장면들이 있다. 사실은 은희가 거울을 보는 것보다 영수가 거울을 보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있을 것이다. 그는 거울 속의 자신을 향해 침까지 뱉었다. 물론 영수의 그 행위만 놓고 보면 이 장면은 아무 의미가 생성되지 않는다. 아니 너무 명확하고 상투적이어서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거울을 자주 보던 은희가 떠오른다. 은희의 거울을 보는 행위는 영수와 같이 살기 전까지 혹은 영수가 그녀를 버리기 전까지만 이어진다. 영수가 그녀를 떠나고 나자 거울을 보는 행위는 이제 은희의 것이 아니라 영수가 해야 할 일이 된 것이다. 은희는 영수와 행복하게 살게 되었을 때 거울을 볼 필요가 없어졌지만, 또한 영수가 곁에 없을 때도 볼 필요가 없어진다. 이미 은희의 고민과 결심은 그 거울을 보며 모두 이룬 뒤고, 그 다음은 은희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결심을 준비하던 그 거울을 보며 영수가 침을 뱉는 일인 것이다. 거울에 비친 자기를 마주한 자의 자기 모욕이라는 이 상투적인 표현은 오로지 은희와 은희의 거울을 기억할 때만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혹은 영수가 전 애인이자 도시 여자 수연(공효진)의 집을 떠나는 후반부 장면에서 카메라의 동선이 거울에서 시작해 뒤돌아 누운 서연의 모습으로 이어진다는 건 지나치기 쉽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조차 수연은 화장대 앞에서 시작한다. 그런데도 수연은 거울을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서울에 살며 도심의 최신식 유행에 젖어 있고 자신의 외양에 특히 신경을 쓰는 수연에게 거울은 더 친밀한 도구일 것인데도 그녀는 그걸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은희와 영수와 수연의 거울을 사이에 둔 삼각의 관계가 형성된다.

죽기 위한 회귀 vs 살기 위한 회귀

연인을 지키기 위해 싸움을 벌이다 패배하는 것과 연인과의 관계를 상상하면서 거울을 보거나 혹은 모욕하는 것이 강력한 통속의 비애를 전파하려는 두 영화의 대표적인 행위다. 그것이 인호와 은희에게 주어진 행위의 의미다. 다만 인호가 몸을 아끼지 않고 싸움을 거듭하며 약속을 위한 맹렬한 이행을 거듭할 때, 그 인물이 정말 아무 의심없이 그것을 행할 때 사실 그건 좀 신파적이다. 그보다는 훨씬 더 고풍스럽고 은밀한 표현이지만, 은희가 정념의 거울을 반복적으로 들여다보고, 영수의 거울이 은희의 거울을 통해서만 의미가 반사된다는 것 역시 좀 신파적이다. 모든 것이 완전무결하고 성스러운 은희의 행위로 은밀하게 통하기 때문이다.

맹렬한 인호, 성스러운 은희는 영화의 한 가지 결과와 만나게 된다. 죽음이다. 두 영화의 죽음이 각자 다른 결과를 낳기는 하지만, 동시에 장소에의 회귀라는 동일한 방식으로 얽혀 있음이 중요해 보인다. 물론 <사랑>에서 인호의 죽음은 선택이다. 자살이다. <행복>에서 은희의 죽음은 자연의 힘에 무릎 꿇은 병사(病死)다. 영수의 배신을 알았을 때 은희는 달려서 목숨을 끊으려 하지만(은희는 폐가 약해 숨이 차면 죽을 수도 있다) 그때 은희의 자살 시도는 인호와는 대치되는 것이고 성공하지도 못한다. 은희는 저절로 죽음을 맞는다.

어쩌면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사랑>은 <로미오와 줄리엣>이며 <행복>은 <미워도 다시 한번>이다. 줄리엣이 죽었다고 생각한 로미오가 자살을 행하고 그가 죽은 걸 알게 된 줄리엣이 따라 죽는다는 이야기는 성별이 바뀌었을 뿐, 인호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자살한 미주와 그녀를 따라 죽는 인호의 이야기로 번안된다. 반면 허진호는 <행복>을 “고시공부 시켜놨더니 합격하고 나서 여자를 등진다는 식의 이야기”라고 비유한 적이 있다. <봄날은 간다>에서 남편에게 배신당하고 지금은 치매에 걸려 있는 늙은 홀어머니를 위해 덜 늙은 홀아비 아들(박인환)이 부르는 노래, 그 늙은 아들의 젊은 아들(상우/유지태)이 사랑에 버림받고 빗속을 우두커니 보며 읊조리던 가사였던 <미워도 다시 한번>은 이제 정서의 유사함으로 <행복> 안에 들어와 있다.

이미 죽은 애인을 뒤따라 죽어 사랑을 지키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보다 더 완전한 합일의 사랑이 또 어디 있을 것인가. 애초에 허진호가 그린 사랑의 초안은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워도 다시 한번>의 배신보다 흔한 배신이 또 어디 있을 것인가. 말한 대로 <행복>에서의 영수는 끝끝내 자신이 사는 길을 택한다. 그가 희망의 집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장면을 은희에 대한 애정과 기억 때문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그는 좀더 일찍 은희에게 갔어야 한다. 영수는 은희가 죽을 만큼 아플 때도 “내가 죽을까봐”라고 겁냈던 사람이다. 그 순간은 비록 반어적인 따뜻한 농담이었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그건 진실이 됐다. 어차피 그대로 두었다면 영수도 곧 죽었을 것이지만, 은희의 죽음이 그를 소환하고 깨우치게 한다. 그러므로 그가 은희의 죽음을 목격한 뒤 정말 두려운 나머지 살고 싶어 희망의 집으로 간다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사랑의 대상을 잃어버렸으나 결국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영수의 사랑법이다. 중요한 건 영수가 가는 그곳이 은희를 처음 만난 곳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인호도 그가 미주를 지켜주겠다고 처음 약속한 그 절벽으로 회귀하여 죽는다. 한명은 살기 위해, 한명은 죽기 위해 같은 장소를 다시 찾아간다.

허진호 영화 속 장소와 인물의 배치

허진호의 영화에서 장소는 대개 시골 또는 지방 소도시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기보다 자연의 풍경이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고, 또 그렇게 말하기보다 바람과 나뭇잎과 흙이 살아 있는 곳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허진호는 바람이 불고 단풍이 지고 눈이 내려 쌓이는 것을 보고 싶어한다. 자연풍경의 그 그윽함, 대도시는 그 미덕을 보여주기에 미흡하고 하려고 해도 다른 느낌을 내게 된다.

허진호가 대도시, 이를테면 서울로 가지 않기 위해 얼마나 버티는지는 <외출>의 사정을 볼 때 알게 된다. <외출>에는 언뜻 상식을 벗어나는 머무름이 있다. 왜 인수와 서영은 사고 직후 그들의 남편과 아내를 곧장 서울의 큰 병원으로 옮기지 않는 걸까. 왜 그들을 조그만 지방 도시 삼척 의료원에서 오랫동안 치료받게 놔두는 걸까. 가족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가족이 그들을 서울의 큰 병원으로 옮기자고 말하는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의사가 마침내 “서울의 큰 병원으로 옮겨보시겠습니까? 지켜보시겠습니까?”라고 서영에게 물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서영이 묻고 다시 의사가 “보호자 분께서 선택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걸 보면 아마도 그동안 옮기지 않았어야 할 의학상의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같이 사고 난 그 여자분은 어떻게 되나요?”라고 서영이 묻고 “(깨어났기 때문에) 서울로 옮기게 됐습니다”라고 의사가 말하는 걸 들으면 다시 의문이 든다. 환자가 의식이 있든 없든 보호자의 뜻에 따라 옮길 수 있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사실 관계를 떠나 정작 이 대사에서 중요한 건 정말 우리가 헤어져 서울로 가야 하느냐는 질문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외출>은 인수와 서영이 같은 곳에 머무르도록 하기 위해 아내와 남편을 삼척 의료원에 그냥 입원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울의 풍경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으며 돌아가면 둘의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을 것 같다. 서울에서 잠시 만났을 때도 그들은 “서울에서 만나니까 이상하네요”라고 말한다. 보기보다 <외출>은 인수와 서영의 동선을 한곳에 모아준 삼척이라는 이 지역과 풍경이 매우 중요한 영화다.

그런데 왜 갑자기 지금 이런 말을 꺼내고 있으며 왜 이 점이 두드러져 보인다고 말해야 하는 것인가. 이유는 허진호의 영화에서 장소 안의 인물이 중요했지만, 그 장소와 인물의 결합의 방식에는 부정교합이 있었기 때문에 흥미로웠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인물이 비록 그 안에 있지만 소도시 혹은 자연의 풍경이 인물 그 자체로 화하고, 그 인물이 곧 죽음이 되고, 죽음이 풍경이 되는 투박한 방정식이 거의 없었다. 은희 같은 여자가 없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병자는 정원이다. 정원의 죽음으로 영화는 끝나지만 그의 죽음이 지역과 동일한 의미로 결코 합일되지는 않는다. <봄날은 간다>에서 은수는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강릉에 살고 상우는 서울의 중심이 아닌 수색에 산다. 서울 인근에 살지 서울에 살지 않는다. 시골과 도시라는 항이 여기에는 없다. 오히려 선한 사람들은 자연에 산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 여기서 죽음은 그 두 인물 중 한명의 것이 아니라 여운처럼 존재하며 겹치는 할머니의 둘레를 도는 것이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죽음을 암시하기는 해도 거기까지 이르지 않는다. 게다가 묘지를 보며 상우와 은수가 나누는 대화(“우리도 죽으면 저렇게 묻힐까”)나 <아리랑>을 부르는 늙은 시골의 부부나 할아버지에게 버림받은 할머니, 그리고 혼자 사는 아버지가 동심원을 그리며 죽음과 삶의 주변을 풍부하게 한다. 그러고 나면 <외출>에서 서영과 인수 두 사람은 모두 삼척의 외지인이며 그 장소는 낯선 곳이다. 장소는 그 인물들의 일탈과 불륜을 허용해주는 곳이지만 그들이 기껏 아는 건 병원과 모텔과 좀더 나은 호텔과 거길 오가는 짧은 골목과 몇개의 찻집 또는 식당과 바닷가뿐이다. 그들은 떠나야 한다. 죽어가는 자들 때문에 만났지만 장소에 발붙이지 못하고 그들은 언젠가 떠나야 할 것이다. <외출>에는 임시적으로 주거하는 자들의 불명료하여 매혹적인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은희와 자연(장소)과 죽음이 하나의 선으로 이어진 것에 비하면 지금까지 말한 전작들의 내용이 훨씬 더 풍족해 보인다는 뜻이다. <행복>에서 갑자기 기묘한 어그러짐이 없는 통속의 관계, 그러니까 병자 대 병자, 배신과 헌신, 죽는 것과 사는 것으로 나뉘어 도식화된 것은 아쉬운 일이다. 앞서 허문영은 다른 경로를 통해 이와 비슷한 <행복>의 대립항에 관해 명료하게 썼는데(<씨네21> 623호 ‘너무도 건실하고 숭고한 통속극’) 나는 지금 거기에 기껏 긴 첨언을 한 셈이다.

곽경택은 자신이 선택한 영화의 풍경에 예민하지 않다. 그보다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성격을 다룬다. 비교하자면 곽경택은 자신이 잘 아는 곳을 택하지만 허진호는 마음에 드는 곳을 택한다. 곽경택의 생활의 공간 혹은 언어와 어투의 공간을 허진호의 풍경과 분위기의 공간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곽경택에게 사투리는 디테일의 문제가 아니라 육체의 문제이고, 허진호에게 자연, 시골, 소도시의 풍경은 그 인물들의 관계의 문제다. <사랑>에서 곽경택은 여전히 지역 혹은 장소의 언어와 육체를 인물 그 자체로 일원화한다. 그런데 허진호조차 <행복>에서 그동안의 관계의 기묘함을 깨고 지역, 장소, 풍경을 인물 그 자체로 만들면서 무언가 생기가 사라진다. 번역할 수 없고 호환될 수 없는 절대 인물의 죽음과 장소 그리고 회귀라는 문제가 여기 있는 것 같다. 사랑과 행복의 추구를 오로지 극단의 예찬과 불운이라는 이중주에 의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걸, 우리는 신파라고 부른다. 우리가 신파라고 말할 때 갖는 적의는 실은 교감과 개입의 여지를 주지 않는 이 지점에 있는 것이다. 지금 <사랑>과 <행복>에 대한 비교가 가능한 것조차 이런 결정론 안에 이 두 영화가 배치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소름이 끼칠 만큼 무서운 남자들의 육체성을 영화 안으로 담아오는 좋은 장면들이 있다. <행복>에는 좋은 장면들이 더 많다. “몸에는 좋은데 재미가 없지”라는 영화 속 대사보다는, 그 순간 모든 의지를 무너뜨리며 맥주를 들이켜고 담배를 피우는 영수를 보며 우리도 같이 좌절한다. 혹은 터미널에서 기다리던 은희가 서울에서 돌아온 영수의 얼굴을 매만지며 “못생겨졌어…”라고 말하는 한마디를 들을 때면 마음이 흔들린다. 그리고 죽은 은희를 염하는 장면은 육체의 사멸을 통해 은희에 관한 판타지를 재고하게 하는 좋은 장면이다.

그러나 곽경택의 영화가 상투적인 드라마투르기를 고수하는 한 얼마나 더 새로워질 수 있는지에 관해 개인적으로 확신이 없다. 허진호에 대해서는 좀 다른 기대가 있다. 허진호의 영화가 자기의 장점으로 돌아가 길을 찾는다면 응원하고 싶다. 나는 허진호가 결국 죽음을 쫓는 예술가라고 생각하며, 사랑이나 행복보다 죽음에 더 절친한 그의 감성이 더 유능해 보인다. 비록 이번 영화에서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 통속의 세계 안에서 죽음과 절대의 사랑을 등치시키고, 절대의 사랑을 가진 자를 죽음과 결부시키는 것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허진호는 죽음을 사랑이나 행복의 일부로 놓고 긴장의 감정을 형성하는 것에 일가견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슬픈 눈물이 좋은 멜로영화를 만드는 건 아니다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자. <사랑>과 <행복>에서 이 추상명사들이 포괄하고 있는 어떤 신랄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물론 이 절대의 진리를 다 이해시켜달라고 말하는 것은 욕심일 것이다. 그러나 두 영화 모두에서 내밀한 형식의 감정과 대화를 듣지 못했다. 그보다 곽경택의 세계와 허진호의 세계가 우연히 마주친 것이 더 염려스러웠고, 거기에 대한 의견을 남기는 것이 더 긴급하게 느껴졌다고 말하는 편이 솔직할 것이다. 허진호의 멜로영화는 통속을 끌어들이되 신파를 끌어들이지 않는 한국 멜로영화의 진귀한 예였다. 다시 말하지만 신파는 그 뜻 자체로 아무 의미가 없다. 다만 강제된 눈물을 호소하는 영화에 대해 비판으로서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신파가 멜로의 모든 것이 될 수 없는데도 그것을 피하지 않고는 좋은 멜로영화가 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망상 때문에 경계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핫한 멜로, 쿨한 멜로라는 감독들조차 빠져 있는 그런 이상한 용어의 힘을 빌려 말하는 중이 아니다. 견고하고 내밀한 멜로영화를 바랄 뿐이다. 그런 멜로영화가 보고 싶다. 좋은 의도가 꼭 좋은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전영객잔의 선배들은 말했는데, 나는 슬픈 눈물만으로 좋은 멜로영화가 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하며 이 가을 객잔에서의 첫 번째 영화의 잔을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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