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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은 이제 그만 난 철학자의 방으로 들어간다”
2001-11-02

난니 모레티의 영화일기 (2)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배운 신동

76년 장편데뷔작 <나는 자급자족한다>를 발표하기 전 그도 영화수업을 받기 위해 수많은 감독들에게 조감독 자리를 부탁했지만 거절당했고, 로마의 국립영화제작학교인 첸트로스페리멘탈레에 입학하려 했지만 대학학위가 없어 이도 불가능했다. 영화광 출신 감독들이 그렇듯 모레티도 결국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보며 감독수업을 한 게 전부다. 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자신의 슈퍼8컬러 카메라로 연기와 촬영실습을 했고, 바로 그 과정을 영화로 찍었는데 이게 데뷔작이 됐다. ‘작품 속 작품’ 혹은 ‘이야기 속 이야기’라는 모레티가 즐겨 사용하는 복합구조는 데뷔작에서부터 발견된다.

그는 60년대 이탈리아 작가감독들의 작품들을 보면서 영화에 빠지기 시작했다. 파졸리니, 베르톨루치, 마르코 페레리, 마르코 벨로키오 등 이탈리아 감독들과 브뉘엘, 베리만 등을 특히 좋아했으며, 앤디 워홀의 영화에도 심취했었다고 말한다. 무성영화 중에서는 에이젠슈테인과 버스터 키튼의 작품을 즐겨 보았다. 인문계 고교를 졸업한 뒤 그는 자신이 어릴 때부터 수집해온 우표를 팔아 슈퍼8컬러 카메라를 구입했고, 이 카메라로 영화찍기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신화처럼 알려져 있다.

20살 때 찍은 그의 첫 단편에서 이미 모레티 영화의 맹아를 볼 수 있다. 모레티는 1973년 2월 이탈리아 금속노조가 총파업을 할 때 슈퍼8로 노동자들의 반정부 집회를 찍었는데, 여기에다 어느 극좌파 학생의 일상이라는 사적인 사건을 섞어 <패배>라는 단편을 만들었다. 좌파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공적인 정치적 사건과 사적인 일상이 맞닿는 병렬구조는 모레티 영화의 큰 특징 중 하나로 자리잡았고 직접적인 사례로는 (1998)을 꼽을 수 있다.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의 이탈리아식 표기법인 <에체 오모>(Ecce Homo)를 장난스럽게 바꾼 게 영화제목이 된 두 번째 장편 <에체 봄보>(Ecce Bombo, 1978)로 그는 스타감독이 된다. 좌우 극단주의자들의 정치테러가 빈번하던 70년대 말을 배경으로 좌절한 좌파청년들의 일상(그들만의 속어, 시간때우기 잡담, 노래듣기, 뒤틀린 사랑 등)을 일기쓰듯이 다큐멘터리처럼 묘사한다. 누벨바그에서 청년들이 처음으로 화면의 전면에 등장하듯, 이탈리아 좌파 청년들과 그들의 세속적인 문화가 화면을 본격적으로 점령하기는 이때가 처음이다.

모레티에 따르면 일기란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그에 따른 감정을 정리한 것인데, 이런 일기는 픽션보다 더욱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수평구조’라는 모레티식 이야기 구조가 이 작품에서 시작된다. 당시 1억8천리라를 들여 만든 <에체 봄보>는 20억리라의 수입을 올리는 상업적 성공을 거둘 뿐만 아니라 베르톨루치 이후 다시 신동이 탄생했다는 비평의 찬사도 받았다. 베르톨루치는 23살 때 발표한 <혁명전야>(1964)로 신동대접을 받았었다.

완고한 정치적 모럴리스트, 새옷으로 갈아입다

<좋은 꿈 꿔>로 상업적으로는 주춤했던 모레티는 스릴러 형식의 <비앙카>(1984),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을 받은 <미사는 끝났다>(1985) 두 영화의 흥행 성공을 기반으로 하여 자신의 데뷔작 제목처럼 ‘자급자족’ 시스템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87년 친구이자 제작자인 안젤로 바르바갈로와 함께 사케르필름이라는 제작사를 차렸다. “이탈리아의 감독들은 자기능력의 5%만을 영화작업에 쏟을 수 있고, 95%는 제작자를 찾고 부탁하고 변심한 제작자에게 전화하고 또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배급자나 홍보담당에게 전화하는 일로 허비한다. 원탁책상에 둘러앉아 쓸데없는 소리만 해대는 관행을 끝내고 싶었다.” 영화사 이름은 삐딱이답게 사케르라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 이름에서 따왔다(그의 영화에는 초콜릿으로 만든 사케르 케이크를 먹는 장면이 흔히 등장한다).

사케르필름의 설립 이후 좀더 직접적인 정치코미디의 제작이 시작된다. <팔롬벨라 로사>(1989), 다큐멘터리 <무엇>(La cosa, 1990), 그리고 (1998) 등 세 영화는 ‘좌파영화 3부작’으로 묶을 수 있다. 선거에서 지는 것이 두려워 자신의 정체성 마저 바꾸려 하는 공산당을 비꼬는 <팔롬벨라 로사>(팔롬벨라는 수구용어로 골키퍼와 골대 사이의 틈을 이용하여 포물선 슛을 날려 골인시키는 것. 정공법이 아니라는 것으로 해석되며 로사는 빨간색으로 공산당을 상징. 즉 공산당의 변칙 골을 의미),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시민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단어라며 ‘공산당’이라는 당명을 바꾸려는 좌파들이 새 당명으로 ‘무엇’을 정할 것인가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무엇>, 그리고 96년 4월 최초의 좌익정부가 들어섰는데 좌익정부의 등장 이후 변한 게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는 등 세 작품은 ‘68세대’의 대변인 모레티가 완고한 정치적 모럴리스트임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유럽 내에 머물러 있던 그의 유명세가 미대륙으로까지 넘어간 것은 일기식 수평구조의 완결판으로 부를 만한 <나의 일기>(1993)를 발표한 뒤부터다. 베스파(이탈리아의 소형 오토바이)-섬-의사라는 세 가지 에피소드 속에 이탈리아인과 이탈리아사회의 세속성을 풍자하고 있다. 특히 1부 베스파에서 모레티는 75년 로마 근교 오스티아 해변에서 괴한의 몽둥이에 맞아 죽은 파졸리니의 잊혀진 묘비를 찾아가며 자신의 영화 속에서 처음으로 선배/전통에 경배를 올렸다(그의 나이 40살이었다). 롱테이크로 찍은 이 장면은 웃음을 유발하는 다른 에피소드들과 대조되며 큰 울림을 던졌는데, 실제로 이탈리아사회에서 잊혀져 있던 60년대의 전사 파졸리니를 되살렸고, 더 나아가 파졸리니 열풍까지 불러일으켰다. 칸 감독상 수상.

새로운 미학으로 전통에 도전하고 옛 질서를 혁파하려는 패기는 프랑스 누벨바그 주인공들에 못지않고, 정치적 신념에 찬 투사로서의 모습은 파졸리니에 비교되는 인물이 이때까지의 모레티였다. 모레티를 공격하는 기사에서 <카이에 뒤 시네마>는 ‘늙었다’라는 형용사도 동원했는데, 예술가에게 ‘늙었다’라는 말을 쓰면 그게 욕이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브뉘엘처럼 60살을 넘겨 미학적·윤리적으로 더욱 도전적인 작품들을 남긴 ‘늙은’ 감독들도 있다. 물리적 노쇠를 변신의 이유로 치부하는 것은 합당치 않고, 게다가 모레티는 아직 50살도 안 됐다. 모레티는 분명히 <아들의 방>으로 옷을 갈아 입었는데 그의 새 옷이 남들도 많이 입는 익숙한 옷이라는 게 아쉬운 대목이다. 한창호/ 영화평론가·이탈리아 볼로냐대학 영화이론 전공

작품목록 1976년 <나는 자급자족한다>(Io sono un autarchico/I Am Self Sufficient) 1978년 <에체 봄보>(Ecce Bombo) 1981년 <좋은 꿈 꿔>(Sogni d’oro/Sweet Dreams) 1984년 <비안카>(Bianca/Sweet Boy of Bianca) 1985년 <미사는 끝났다>(La messa e’ finita/Mass Is Ended) 1989년 <팔롬벨라 로사>(Palombella rossa/Red Wood Pigeon) 1998년 (Aprile/April) 2001년 <아들의 방>(La stanza del figlio/The Son’s Room)▶ 난니 모레티의 영화일기 (1)

▶ 난니 모레티의 영화일기 (2)

▶ 난니 모레티의 1인제작 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