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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 간달프 역 이안 매켈런의 제작 일지
2001-12-21

무덤 속의 톨킨이 우리를 이끌었다

이안 매켈런은 도전을 즐긴다. 이미 40년 넘는 세월을 무대와 카메라 앞에서 보낸 그는 예순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와 런던을 넘나들며, ‘지금이 전성기’임을 온몸으로 과시하고 있다. <리차드3세>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 <갓 앤 몬스터> <엑스맨> 등으로 자신의 연기 스펙트럼을 유감없이 펼쳐 보인 그는 할리우드의 잦은 러브콜에 신중을 기해 응답하곤 했다. 막판 하이라이트는 그런 그가 <반지의 제왕>의 2년6개월에 걸친 대장정에 참여했다는 사실. 그는 반지 원정대를 이끄는 지혜로운 마법사 간달프 역할을 맡아, 중세의 자연과 신세기의 테크놀로지가 공존하는 뉴질랜드에서 촬영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반지의 제왕>에 참여했던 지난 이야기들을, 때론 아이처럼 말간 호기심에 들떠, 때론 현자의 진지한 사색체로, 기록해놓았다. <반지의 제왕> 국내 홍보사 영화인에서 제공한 이 제작 일지는 이안 매켈렌의 홈페이지에도 그 전문이 올라 있다. 이 글은 일지의 일부를 발췌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감히 거절할 수 없는 프로젝트

1999년 8월20일

배우는 자신이 맡을 역할만 신경쓰는 줄 알겠지만, 그렇지 않다. 난 배역보다는 작품 전체를 생각했다. 감독은 누구인가, 배우는 누구인가, 얼마나 오래 걸릴 것인가, 내가 과연 그 로케이션에서 일하고 싶어하는가, 하는 문제들. 그래서 뉴질랜드의 신비로운 풍경 속에서 <반지의 제왕> 3부작을 한꺼번에 찍는다는 사실에 처음부터 솔깃했다. 아름다우면서도 기이하고 장엄하기까지 한 대자연 속에서, 그것도 <천상의 피조물들>의 연출자가 지휘봉을 잡는다고 하니, 객지에서의 지난한 촬영도 감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감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만일 갠달프 역을 맡지 못했다면(영화 <엑스맨>의 스케줄과 겹쳤기 때문), 나중에 다른 역할로라도 그 3부작에 동참하겠다고 얘기할 참이었다. 이건 정말 큰 프로젝트다. 1999년 10월에 (나없이) 시작하는 <반지의 제왕>의 촬영에 행운이 있기를 빈다. '잘 표현하는'게 아니다. 간달프가 되어야 한다.

1999년 10월14일

<반지의 제왕>의 여정은 나를 빼고 시작됐다. 10월11일 월요일, 엘리야 우드와 다른 배우들이 호비튼에 모여 촬영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난 토론토에서 브라이언 싱어의 영화 <엑스맨>에서 초능력자의 리더인 매그네토를 연기하고 있었다. 방금 피터 잭슨 감독에게 행운을 빈다는 이메일을 보냈다. 답장이 올 거라는 기대는 애당초 접었다. 한편의 영화를 만드는 데에는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톨킨의 열성팬들로부터 속속 편지가 도착하고 있다. 남녀노소 독자들이 충고와 요구와 경고의 메시지를 띄우고 있지만, 그들의 소망은 하나였다. 영화 속에 비칠 갠달프의 모습이 소설 <반지의 제왕>을 읽으면서 연상했던 이미지와 일치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들이 나의 캐스팅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놓인다. 그러나 저마다 다른 모습의 갠달프를 떠올리고 있는 그들을 어떻게 일일이 만족시킬 수 있는가? 단언컨대 난 못한다.

나는 리처드 3세나 제임스 웨일, 혹은 매그네토를 연기할 때처럼 내 안 어딘가에서 갠달프를 발견해야 한다. 대사와 상황에 몰입하고, 감독, 배우들과 호흡을 맞춰가면서, 그 발견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나만의 갠달프는, 심지어 내 마음속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갠달프는 카메라가 돌아가는 그 순간에만 나타날 것이다. 의상을 입고, 분장을 하고, 톨킨의 언어로 말한다 할지라도, 난 그 배역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배우는 표현하는 게 아니라, 그냥 존재할 뿐이니까.(Actors don’t describe-they inhabit.)

소설에 일러스트레이션이 많지 않았다는 건 다행스런 일이다. 그걸 일일이 베껴야 했을 테니까. 소설 표지의 갠달프 그림을 살아 숨쉬는 배우가 체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의상디자이너와 헤어메이컵 스타일리스트는 톨킨이 묘사한 대로 “크고 뾰족한 파란 모자, 긴 회색 망토, 그리고 은색 목도리, 긴 흰색의 턱수염”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크다”는 얼마나 큰 것이며, “길다”는 얼마나 긴 것인지. 그리고 “그의 모자챙을 뚫고 나온 짙은 눈썹”은 뉴질랜드의 강풍 속에서 얼마나 사실적으로 표현될 수 있을지.

해답은 각 부문 디자이너들, 그리고 웰링턴의 WETA 작업실에서 2년 동안 준비해온 기술팀이 찾아낼 것이다. 난 그들이 심사숙고 끝에 만들어낸 작품을 보고 완전히 압도당했다. 마스크, 갑옷, 무기들은 완벽했고, 시각효과 전문가의 손길로 재탄생한 뉴질랜드의 풍경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호비트를 소설에서처럼 작은 키의 종족으로 보이게 할지를, 내가 이해하기엔 너무 복잡하고 전문적인 방법으로 풀어내고 있었다. 그들은 골룸을 배우에게 맡길지, 인형으로 표현할지, CG로 만들어낼지, 아니면 이 세 가지 방법을 총동원해 만들어낼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어린애처럼 특수효과에 매료된 나는, <반지의 제왕>의 마법(특수효과)이 궁금해 애태우는 팬들을 이해하게 됐다. 과연 그 비밀들이 공개될지 그렇다면 언제일지는 그 열쇠를 쥐고 있는 피터 잭슨만이 아는 일이다.

<엑스맨>의 세계를 떠나 '중간계'로2000년 1월8일

이 날짜는 확실치 않다. 이맘 때 웰링턴을 출발해서 12시간의 비행 끝에 LA에 도착했다. 난 손목시계가 없다. 영국이 8시간 빠르고 뉴질랜드는 4시간 정도 늦다는 걸 알고 있을 뿐이다. 이제 올해가 저물고, 21세기가 도래했음을 느낀다. <엑스 맨>의 촬영도 거의 다 끝났다. 난 런던의 집에서 친구와 가족을 만나고 함께 새 천년을 보냈다. 가방을 꾸리고 나니, ‘중간계’가 눈 앞에 다가와 있다.

작품을 지휘하는 건, 톨킨이다 2000년 1월25일

우리는 웰링턴 스튜디오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비행거리에 있는 마을에서 촬영하고 있다. 일년 전에 지어진 이 세트는 사계절을 겪어, 아주 자연스러웠다. 공동으로 가꾸는 정원에는 해바라기, 데이지와 들풀들이 만발했고, 배추와 과일이 익고 있었다. 우리의 호비튼 세트는 푸른 구릉지와 완만한 계곡에 둘러싸여 있어, 그 자체로 안락한 보금자리처럼 보였다. 호비트들의 집 굴뚝에서는 기계로 기름을 태워 만든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고, 갠달프가 지난주에 두드렸던 대문은 카메라만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살짝 열려 있었다. 내부장식은 조만간 세팅이 된다고 한다. 풍차부터 다리까지 디자인팀이 만든 구조물들은 정말 사실적이었다.

피터 잭슨은 무덤 속의 톨킨이 이 작품을 지휘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갠달프의 외양을 꾸밀 때마다 소설 속에서 생동감 있는 묘사를 찾아내곤 했다. 그가 뉴질랜드의 영웅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만큼 긴 시간을 함께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영화예술 분야에서 국민적 영웅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예술적인 대담성은 그렇다치고, 그는 이 작업으로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냈고, 국제적인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는 <반지의 제왕> 3부작을 기술과 규모상으로 자신의 ‘에베레스트’라고 부르고 있다. 크리스토퍼 리와의 첫 촬영 2000년 3월12일

빌보의 집 세트는 웰링턴 스튜디오에 온전히 보관돼 있다. 그곳에는 똑같은 세트 두개가 있는데, 그 이유는 따로 있다(만약 영화 속 마술이 궁금하지 않다면, 다음 단락은 뛰어넘으시길).

호비트는 영화 속에서 다른 캐릭터보다 작게 보여야 한다. 나(갠달프)는 빌보의 집에서 천장에 머리를 찧기도 한다. 그런 장면은 미니어처 가구와 소품에 어울리는 작은 세트에서 촬영한다. 여기에서는 실제 호비트처럼 키가 작은 대역 배우가 빌보와 프로도를 연기한다. 큰 세트는 보통 집과 비슷한 크기다. 이 세트에서는 호비트족의 배우들이 정상적으로 출연하고, 거구로 보여야 하는 나(갠달프)의 대역 연기자(7피트4인치)가 필요하다. 상황에 따라 비율을 생각하며 연기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렇지만 우리는 잘해내고 있다!

지난주에는 난생 처음 크리스토퍼 리(사루만)와 촬영하게 됐다. 갠달프가 오르상크 첨탑에 갔다가 사루만과 마주치는 장면이었다. 사루만은 그때 마법의 돌을 들여다보며 예견을 한다. 난 내가 드라큘라와 셜록 홈스였던 이와 함께 있음을 실감할 수 없었는데, 눈부시게 흰 마법사 의상을 입고 있는 그의 자태가 성인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리는 배우에게 정확한 발음이 생명이라는 걸 입증해왔다. 그의 200편(혹은 300편?) 영화는 관객에게 셰익스피어 시대의 발음을 다시 들려주었다. 지금 오르상크의 첨탑 아래 서 있는 그는 관록과 권위를 갖춘 리어 왕처럼 보인다. 그는 78살이고, 잘생긴데다가 힘이 넘친다. 그가 대사를 하면, 늙은 동료는 사라지고, 눈앞에 사루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맘에 들지 않았다. 그 소리는 날 불안하게 만든다. 그에게 긴 송곳니가 없다는 게 다행스럽게 느껴질 만큼. 숏마다 다른 모습의 이안 홀름 2000년 8월8일

런던에서 이안 홀름 경이 도착했다. 그는 시차에 적응하지 못한 상태에서 곧바로 의상을 맞추고 분장 테스트를 하는 등 촬영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촬영을 하면서 절대 같은 연기를 반복하지 않는다. 숏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만, 늘 그 캐릭터 안에서 놀았다. 영화로 보는 빌보의 연기는 전에 시도한 적 없는 전혀 새로운 버전일 것이다. 그는 이렇게 캐릭터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만화경에 비유한다. 그리고 감독의 선택 폭을 넓혀준다.

영화란 얼마나 제한적인가. 같은 영화를 아무리 여러 번 본다 해도, 배우의 연기는 달리 보이지 않는다. 대형 스크린에서든 747 비행기 모니터 화면에서든 똑같다. 그러나 연극무대에서 배우의 연기에 주목해 여러 번 본다면, 다른 면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안 홀름은 바로 그 생생한 극장의 느낌을 스크린에 옮겨놓는다. 필름 속에는 “완벽한 빌보”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촬영 1년을 넘기다2000년 10월30일

며칠 전, 피터 잭슨에게 스케줄대로 영화가 끝날 것인지 물어봤다. 그는 우리가 계획대로 끝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난 끝을 생각하면서 촬영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서 물었다. 한때 주디 덴치와 나는 포춘 시어터의 탈의실 거울에다 날짜를 써놓고 지우곤 했다. 낮에도 공연이 있는 날은 그 짓을 두번씩 했다. 지금은 물론 그 정도는 아니다. 이곳 뉴질랜드가 선사한 색다른 희열은, 집을 떠나 일년 넘게 촬영한 대가로 돌아온 보너스니까.영화 테마파크 같은 리벤델 세트2000년 11월28일

최근 몇달 동안 <반지의 제왕> 팬사이트에서는 영화 속에서 캐릭터들이 어떻게 나오는지에 대한 채팅이 이어졌다. 원정대의 여정이 어떤 풍광 속에서 펼쳐질지에 대한 의문이나 토론은 드물었다. 그것은 아마도 알란 리가 이 영화의 미술팀에 합류하면서, 하퍼콜린스판 <반지의 제왕>에서 먼저 보여준 수채화 일러스트레이션을 토대로 작업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정들의 터전인 리벤델 세트로 걸어들어갈 때, 나는 너무 놀라서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것은 알란 리의 일러스트레이션 작품 속에 펼쳐진 거대한 삼차원 세계 같았다. 영화 테마파크가 지향하는 스릴은 이런 게 아닐까. 섬유유리와 캔버스로 만든 가을 숲 오솔길을 따라 가니, 전기로 움직이는 폭포가 연못으로 떨어지고 있고, 그 위로 일본식 다리가 놓여 있었다. 조명을 지지하기 위해 세운 철 구조물 위에는 효과팀이 낙엽 부대를 들고 대기중이었다. 모든 게 제자리에 있는 듯했다. 그곳은 분명 요정들의 터전 리벤델이었다.

이 세트는 <프리실라>의 배우 휴고 위빙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요정들의 리더인 엘론드를 연기했는데, 우리가 함께 나오는 건 그가 주재하는 회의장면에서였다. 요정과 인간, 난쟁이와 호비트, 마법사가 한데 모이고, 바로 그 자리에서 프로도에게 반지 파괴의 임무가 주어진다. 소설에서 갠달프는 이때 사루만과 맞붙었던 이야기를 보고하지만, 영화에서는 그 사건을 보여주기 때문에 나(갠달프)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다. 이 장면은 촬영하는 데 꼬박 3일이 걸렸다. 유쾌한 친구 휴고 위빙이 다음 작품 <화이트 데빌> 때문에 우리를 떠나야 했을 때 몹시 슬펐다.뉴질랜드 촬영분이 끝나다2001년 1월1일

근하신년, 끝났다!

<반지의 제왕>의 주요 촬영은 크리스마스 전 금요일에 서둘러 마쳤다. 난 영국의 집으로 돌아왔다. 나머지 스탭 캐스트들(3천명이 넘는다)은 다음 호출을 기다리며 휴일을 보내고 있다. 세트도 철거됐다. 그런데 장장 18개월 동안 촬영한 3부작의 첫편,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를 보기 위해 어째서 12개월을 더 기다려야 하는가?

사실 영화촬영이 모두 끝났다는 건 거짓말이다. ‘배우의 주 촬영’은 끝나서, 다시 뉴질랜드로 모일 일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1월 중순경 피터 잭슨의 요구대로 연결 부분을 촬영할 것이다. WETA의 디지털 작업실에서는 디지털 배우를 만들고 합성을 하느라 더욱 분주해질 것이다. 피터 잭슨의 최종 프린트가 뉴라인사의 승인을 기다리는 단계에도, 호주, 유럽, 아시아, 북아메리카로 흩어져 있는 배우들이 모여 대사를 녹음해야 하는 어마어마한 작업이 남아 있다. 음향효과와 음악작업도 기다리고 있다. 우린 이렇게 대작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러니 세상은 우릴 기다려야 한다.재녹음과 프롤로그 보충촬영2001년 5월21일

4월13일 금요일, 뉴질랜드에 상륙한 폭풍이 부활절을 망쳐버렸다. 마침 <반지의 제왕> 3부작 중 1부의 최종 버전이 6월 초 뉴라인 제출용으로 다듬어지고 있었다. 내가 겨울 내내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동안, 피터 잭슨과 소수 정예 스탭들은 무더운 뉴질랜드에서 여름 내내 일하고 있었다. 웰링턴 스튜디오의 방음장치가 허술해 거의 모든 대사를 다시 녹음해야 했다. 숀 빈(보르미르), 이안 홀름(빌보), 크리스토퍼 리(사루만)가 재녹음을 위해 동원됐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좀 다르다. 이번 겨울에 상영될 1부의 내용이 약간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도입부에 절대 반지에 얽힌 이실두르와 스미어골의 이야기가 새로 추가됐다. 원작에서처럼 빌보의 111살 생일 파티를 위해 호비튼에 도착하며 영화도 시작되는데, 이는 사전 공개분을 위해 조금 늘어났다. 따라서 보충 촬영이 필요했다. 등장 인물들과 배경 설명이 덧붙여진 프롤로그로 관객이 쉽게 영화를 따라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안심이 된다.피터 잭슨은 편집중 2001년 7월24일

이달 초 엿새 동안 뉴질랜드에 머물렀다. 그 사이 피터 잭슨이 영화의 첫 부분을 수정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어떤 이들은 뭔가 크게 잘못된 모양이라고 떠들어댔다. 그런 냉소적인 반응들은 칸에서 공개한 20분 분량의 클립이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사를 끌어낸 데 대한 반작용이 아닐까. 감독이 영화를 수정하는 건 흔히 있는 일로, 주방장이 마지막 양념을 치거나, 작가가 교열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피터 잭슨이 편집하는 것을 지켜보며, 그의 통찰력과 재능에 깊이 감동을 받았다. 어떤 감독은 편집하는 과정에서 영화의 모양을 만들어가지만, 피터 잭슨은 머릿속에서 이미 기본 편집과 결정을 마친 듯했다. 6월에는 뉴라인의 간부들이 피터의 작업실에 모여 1부의 예비 버전을 봤다고 한다. 밥 와인스타인은 직선적인 사람이지만, <반지의 제왕>이 정상 궤도에서 제대로 굴러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감독과 부딪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웰링턴에서 다른 동료들과 재회하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휴고 위빙은 시드니에서 <매트릭스> 속편을 촬영하다 말고 날아왔다. 엘리야 우드, 숀 오스틴, 비고 모텐슨은 할리우드에서 달려왔다. 크리스토퍼 리, 존 라이스-데이비스는 런던에서 건너왔다. 브로드웨이에서 공연중인 <죽음의 댄스> 스케줄이 제대로 끝나준다면, 우리는 월드 프리미어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 괴로운 정킷, 반가운 재회 2001년 8월28일

영화 출연 계약을 하면서 대부분의 배우들이 지나치는 사항 중에는 영화의 홍보 활동이 포함돼 있다. 홍보 활동에 얼마나 동원되느냐의 문제는 배우 개인의 위치에 달렸다. 신인 배우들은 정킷에 참여해 인터뷰에 응하는 것 자체가 흥미로울 수 있지만, 나는 몇해 전 <리처드 3세>의 독일 개봉에 즈음해 베를린에 머무르며 호된 경험을 했다. 사흘 동안 75건의 인터뷰를 했는데, 그때 얻은 두통이 일주일 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정킷은 가능하면 피할 일이다. 하지만 지난 5월 뉴라인이 칸영화제에 나를 초대했을 때는 기꺼이 응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반지의 제왕> 원정대 팀, 그리고 피터 잭슨과 재회하는 기쁨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지의 제왕>의 클립을 상영하는 시내 영화관에서 만났다. 나는 뒤쪽에 자리를 잡았는데, 옆에는 크리스토퍼 리 부부가, 앞에는 엘리야 우드가 앉아 있었다. 피터 잭슨과 뉴라인의 총수 밥 셰어가 우리를 반기면서 시사 내용은 최종 완성본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런들 어떠리. 조명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됐다. 갠달프가 마차를 몰고 마을로 들어가고 있었다. 저 장면을 찍은 것이 벌써 16개월 전이다. 자신이 연기한 것을 지켜볼 때의 당혹스러움이란. 피터 잭슨의 이미지는 설득력이 있을 뿐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매우 훌륭했다. 알란 리의 그림책이 살아 숨쉬는 것 같았다. 실제 배우뿐 아니라 디지털 배우의 모습도 근사했다. 내(갠달프)가 고대 괴물 발로그와 대적하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지하 절벽에 선 갠달프가 발로그에게 “넌 건너올 수 없다”고 호령하고 있었다. 우리는 박수가 부끄럽지 않았다. 호비트족을 연기한 배우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프로도를 연기한 엘리야 우드는 다시 보자고 졸라댔다.

다음날 힘든 숙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정킷을 준비했다. 배우들은 셋씩 나누어 매체들과 인터뷰를 시작했다. 12그룹의 기자단과 만났지만 질문은 거의 다 비슷해서 우리는 같은 답을 되풀이했다. 다음날 TV 인터뷰는 더 심했다. 나는 이안 홀름, 크리스토퍼 리와 7시간 동안 붙잡혀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온 리포터들이 간단한 인터뷰를 했고, 두대의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우리 나이를 들먹이곤 했는데, 이런 무례한 무리들 앞에서, 크리스토퍼 리는 6개 국어를 유창히 구사해 보였다. 오후로 접어들자 이안 홀름은 자신도 다양하게 답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인지, 같은 질문에도 다른 답을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밤새 외운 대사를 무대에서 틀려버린 동료를 지켜보는 기분이 들었고, 그 상황이 너무 우스웠다. 처음엔 미소만 짓다가 곧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지친 나머지 난 통제력을 잃고 크게 웃기 시작했다. 이안은 굴하지 않고 계속 얘기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발을 구르며 웃다보니 도망가고 싶어졌다. 나는 마실 걸 찾아 뛰기 시작했다. 크리스(크리스토퍼 리)는 내가 미친 줄 알았다고 했다. 왜 아니겠나. 드디어 뚜껑이 열리다 2001년 11월27일

드디어 뉴욕의 한 시사실에서 <반지의 제왕>을 봤다. 뉴라인에서 초대한 40명의 관객은 영화 내용에 대해 발설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 그 맹세는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20세기 최고의 소설 내용이 어찌 비밀일 수 있을까.

톨킨의 상상력이 스크린에 펼쳐지고 있었다. WETA의 특수효과는 이음새조차 보이지 않았고, 뉴질랜드의 자연 풍광 속에 펼쳐진 중간계는 사실적이었다. 캐릭터들도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 이상한 세상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대중은 귀도 얇고 전염도 잘된다는 걸 알고 있다. 요즘 나는 런던 프리미어와 언론 시사에 끼고 싶어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 만발이다. 하지만 진짜 승부는 12월19일 개봉부터다. 나는 관객이 이 영화를 커다란 스크린으로 한번 이상은 보길 바란다. 놓쳐버리긴 아까운 디테일들이 너무 많다. 소설에 대해 모른다면, 영화를 보기 전에 서둘러 읽진 마시라. 영화의 내러티브는 충분히 명확하다. 톨킨의 원작이 궁금하다면 시간은 넉넉하다. 2부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 개봉까지는 1년이나 남아 있지 않은가. 정리 박은영 cinepark@hani.co.kr

프로도/ 엘리야 우드

1m 남짓한 키에, 먹고 담배피고 얘기하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온순하고 낙천적인 종족 호빗의 일원. 삼촌 빌보의 111살 생일에 반지 하나를 물려받는데, 그것이 바로 악의 부활을 부르는 절대 반지였던 것이다. 힘도 약하고 겁도 많지만, 반지의 힘을 빌리고자 하는 유혹에는 누구보다도 강하다. 절대 반지를 파괴하는 임무를 맡아, 불의 산으로 모험을 떠난다.

간달프/ 이안 매켈런

호빗족과 돈독한 우정을 쌓아온 마법사로, 호빗족의 경조사에는 빠짐없이 얼굴을 비친다. 회색 망토에 뾰족 모자, 희고 긴 수염이 트레이드 마크. 프로도에게 절대 반지의 비밀을 알려주며, 불의 산으로의 여행길을 안내한다. 악마에 굴복한 마법사 사루만에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반지 원정대의 정신적인 지주라고 할 수 있다.

사루만/ 크리스토퍼 리

한때 존경받는 마법사였지만, 지금은 악마 사우론의 심복이 됐다. 호빗의 손에 넘어간 절대 반지를 사우론에게 돌려준 뒤, 악의 세계를 완성하려는 야심이 있다. 호빗의 편인 간달프에게 호된 벌을 내리고, 지하 괴물들을 부활시켜 군대를 만드는 등 원정대의 여정을 방해하는 원흉. 본래 흰 옷을 즐겨 입는데, 그 순백의 빛깔도 변색된다.

아라곤/ 비고 모텐슨

북쪽 인간땅의 순찰대장으로, 용맹한 미나스티리스 일족의 마지막 후손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떠돌이 무사로, 무공이 뛰어나고 의리가 있다. 반지 원정대에 합류해, 프로도와 그의 친구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핀다. 전투 도중 만난 요정 아웬(리브 타일러)과 종족을 초월한 사랑을 나누게 되는데, 아웬은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영생을 포기하려 한다.

갈라드리엘/ 케이트 블란쳇

신비로운 아름다움과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요정들의 여왕. 아웬이나 그 아버지 엘론드(휴고 위빙)도 모두 그녀의 후손이다. 신비한 황금숲에 머물며, 만물의 마음을 읽고 미래를 예견하는 힘을 지녔다. 반지 원정대의 든든한 후원자로, 스스로 반지에 대한 욕망을 시험하기도 한다.

김리/ 존 라이스 데이비스

호빗처럼 키가 작지만, 단단한 체구에서 과격하고 난폭한 기질을 뿜어내는 난쟁이 종족의 일원. 난쟁이들을 땅 속 진흙괴물이라며 무시하는 요정들과 번번이 충돌하지만, 속이 깊고 우직하다. 반지 원정대에 합류해 특기인 도끼질로 동료들을 위기에서 구하곤 한다.▶ 원작과 감독, 제작과정까지 <반지의 제왕 : 반지 원정대>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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