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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섹스, 그리고 대한민국
2001-12-29

<슈가 힐> <굿 로맨스>의 이송희일 감독

이송희일(30) 감독은 커밍아웃한 게이다. 2년 전부터는 어머니의 성을 따서 부모 성을 함께 쓰고 있기도 하다. 사정 모르는 이들은 그래서, 이름이 ‘송희일’이냐고 묻는다. 한술 더 떠 자기 추측대로 ‘이송희’ 감독이라고 잘라 부르는 이들도 있다. 본인은 그런 반응에 외려 무덤덤하다. 99년 한 방송사의 토론회에 나가 전국적인 ‘커밍아웃’을 하고서 고향인 익산의 전주 이씨 문중으로부터 ‘죽일 놈’ 소리까지 들었는데, 그 정도가 무슨 대수랴. 당시 동성애자 인권연대 모임인 ‘친구사이’의 회장이었던 그는 그 사건으로 “서울가서 못된 짓만 배운 증손을 잡아들이기 위한” 체포결사대까지 조직됐었다고 웃는다.

‘젊은영화’ 차리고, 접고, 낙향하고

그는 독립영화계에선 몇 안 되는 스타 감독으로 꼽힌다. 이런 분류에는 그런 개인적인 이력이 작용하기도 했다. 또 최근 2년 동안 내놓은 <슈가 힐>과 <굿 로맨스>가 경쟁영화제에서 여러 차례 수상하며, 지면에 오르내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를 주목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의 등장은 90년대 후반 독립영화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정치적인 검열과 자본의 간섭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80년대 커다란 독립영화의 축에 그는 ‘퀴어영화‘라는 다소 생경한 깃발을 내걸었다. 그리고 <슈가 힐> <굿 로맨스> 등 두편의 영화에서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관심사를 진지한 어법과 세련된 연출로 넓혀왔다.

그런 이송희일 감독이 독립영화 진영에 결합한 지도 내년이면 벌써 7년이다. 95년, 약수동에 열평 남짓한 사무실을 차려놓고, 김성숙, 고은기, 박경목, 김규철 등과 함께 ‘젊은영화’를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가 처음부터 꼭 집어 영화를 하겠다고 맘먹은 건 아니었다. 팬티 2장에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싸서 밤차 타고 상경할 때의 뜻은 학술운동을 계속하기 위한 대학원 진학에 있었다. 신촌의 6만원짜리 싸늘한 독서실에서 기거하며, 근처 대학의 도서관에 처박혀 생활한 지 6개월. “책 읽는 건 혼자서도 할 수 있겠다 싶어” 관심을 갖고 있던 영화운동으로 목표를 바꾸었다. 그래서 합류한 곳이 독립영화 워크숍. 거기서 만난 김성숙 감독과 독립영화 상영회를 준비했지만, “틀 만한 것이 있네, 없네 궁상떨지 말고 차라리 우리가 찍자”고 의기투합한 것이 젊은영화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만만치가 않은 일이었다. 애초에는 모두들 기획이 돋보이는 프로젝트부터 시작하고, 이 순서대로 서로의 작품에 품앗이하자는 계획을 세웠지만, 모두 연출을 지망하는 상황에서 다섯이 의견일치를 보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제비뽑기로 순서를 정해야 했고, 순번이 밀린 그 역시 그러면서 활동에 열의를 잃었다. 그 무렵, 한달 동안 술로 날을 지새운 탓에 장염을 얻었고, 교통사고로 인해 허리에 철심 박고서도 매일 밭에 나가서 일하시는 시골의 홀어머니 생각도 자주 났으며, 그게 2년을 버티지 못하고 낙향한 이유가 됐다. 덧붙이자면 그의 중도 포기에는 “여전히 영화가 부르주아적인 매체”라는 의심도 작용했다.

거슬러, 대학 시절 그는 지독한 교조주의자였다. 학생운동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중·고등학교 시절 시내의 재개봉관을 안방삼아 주윤발의 우아한 총알발레부터 에로물인 인신매매 시리즈까지 가리지 않고 보았던 그는 대학물을 먹고선 “이데올로기 오염의 주범인 영화”를 멀리했다. 4년 동안 그가 본 영화라곤 <사랑과 영혼>, 딱 한편.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영화는 영혼을 경작하는 트랙터”라는 경구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분명 다른 일을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꾹꾹 눌러놓았던 영화에의 짝사랑은 그렇게 다시 불붙었다. 정작 본인은 큰 의미를 두지 않지만, 그가 감독의 길을 택한 데는 영화광이었던 아버지의 영향도 컸다. 천성이 착했지만 게을렀다는 아버지는 군산에 있는 외갓집에 다녀올 때면 아들을 끼고서 꼭 극장을 들렀다. 병석에 누운 이후로 그런 기회는 더이상 지속되지 않았지만, 자신이 봤던 영화들과 배우들에 대한 기록을 빼곡이 적어놓은 비밀수첩은 지금 감독의 길을 걷는 아들에겐 더없는 격려다.

어쨌든 금마 황복골에서 반바지 입고, 클래식 들으며, 쇠스랑으로 밭 갈던 1년은 행복했다. 남는 시간엔 대학을 졸업할 무렵 받은 장학금 70만원으로 장만한 TV와 비디오를 껴안고 살았고, 고등학교 때부터 끼적이던 소설 습작에도 다시 몰두했고, 초등학교 시절 일찌감치 배운 경운기와 오토바이로 드라이브를 즐기며 바람을 쏘이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영화를 포기하고 얻은 달콤한 휴식은 이내 곤궁한 생활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지금이야 자신이 신세를 지는 처지지만, 여동생 둘이 막 대학에 들어가면서 ‘나 몰라’ 하고 모든 걸 어머니에게 맡겨둘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두 번째 상경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처음 1년은 그저 착실한 직장인이었다. 글 재주 덕에 문학아카데미라는 출판사에 다니면서 저축도 했고, 적은 액수지만 집에 돈을 부치기도 했다.

독립영화의 미래? 낫싱.

동성애자 인권단체인 ‘친구사이’를 알게 된 것은 그 즈음,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영화에 대한 갈증도 마침 일기 시작하던 차에, 그는 월급 모아 마련한 300만원으로 주말마다 게이 친구들을 출연시켜 자신의 일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그의 첫 번째 영화 <언제나 일요일 같이>를 만든다. 아무래도 그의 존재를 알린 건 지난해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에서 대상을 차지한 <슈가 힐>. 영화내용은 이렇다. 서로 사랑하는 두 남자가 있다. 이중 한 남자는 결혼을 재촉하는 가족들의 성화에 시달린다. 그런 그에게 동성 애인은 자신의 누나와 결혼할 것을 종용한다. 남자는 이를 받아들이고, 둘은 그렇게 헤어진다. 그러던 어느날, 여자는 두 남자의 사랑을 목격한다. 예고된 불행은 이제, 현실이 된다. 백수이다보니 ‘친구사이’ 사무실에서 누가 시키지도 않은 상근을 자처하며 숙식을 해결하고 라면으로 연명하던 시절, 아는 형으로부터 우연히 들은 이야기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올해 여름에 내놓아 제26회 한국독립단편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굿 로맨스> 역시 30대 여성과 10대 고등학생의 원조교제를 삐딱한 시선이 아닌 평범한 두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고, 그리워하는 관계로 묘사한 뛰어난 디지털영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더불어 한치 끼어들 틈도 없는 긴장선이 팽팽하게 흐른다. 그것은 마치 시소를 타는 듯한 느낌인데, 영화 속 인물들을 따라 관객 또한 구속하는 제도에 포섭되면 하강의 고통을, 에로스적 욕망을 택하면 상승의 쾌감을 번갈아 맛보는 식이다.

사자성어 프로젝트 중 하나인 <마초사냥꾼>을 끝낸 지금, 그는 아쉬움이 많다. 시간이 촉박해서 자신이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내놓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이다. 도중에 그만두고 싶기도 했지만, 다른 감독들과 스탭들에게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어 접었다. 현재 충무로의 한 영화사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할 계획을 나누고 있는 중. 하지만, 그는 충무로 진입보다 지난해 이스트만코닥단편영화 제작지원에 선정됐지만, 몰아친 한국영화 붐 때문에 정작 제때에 카메라를 구하지 못해 미뤄진 <이발사의 곤돌라>에 관심이 쏠려 있다. 53살의 이발사가 어느날 불현듯 동성애에 대한 끌림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는 단편이지만, 그는 이를 시작으로 레즈비언, 양성애자, 장애인, 청소년 동성애 등을 다룬 연작 에피소드 묶음으로 만들 계획을 갖고 있다. 주위에선 너무 섹슈얼리티 문제에 함몰된 것 아니냐고 우려하지만, 그는 당분간은 이를 화두로 주변의 인간관계에 천착하고 싶다고 말한다. “독립영화의 미래”는 “낫싱”이라고 답하는 이 괘씸한 이단아는 그런 자기부정을 동력으로, 지금껏 미지의 영토를 발견해왔다. 이영진 anti@hani.co.kr

<굿 로맨스> 는 어떤 영화?

여관으로 간 유부녀와 고등학생

미현은 33살의 유부녀다. 그녀는 한달 만에 18살 고등학생인 원규를 찾아간다. 원규 역시 그런 그녀가 싫지 않다. 둘은 재회의 장소로 여관을 택한다. 하지만 이내 미현은 목에 난 상처를 두고 원규에게 자신을 배려하지 않는다고 탓하고, 원규는 전화번호조차 알려주지 않는 미현의 일방적인 태도에 화를 낸다. 결국, 둘은 그렇게 헤어지지만, 돌아가지 못하고 눈 내리는 거리에서 서로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다. 원조교제를 소재로 했지만, 영화는 이들의 관계를 세간의 기준으로 재단하지 않고 대신 ‘굿 로맨스’라 부른다. 좁은 방안에서 팽팽히 맞서는 두 배우의 연기에, <눈물>의 이두만 촬영감독의 카메라까지 더해져, 영화는 연극무대 위의 생생한 갈등을 그대로 도려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 한국 독립영화계의 두 이단아 김정구, 이송희일 감독

▶ <샴·하드 로맨스>의 김정구

▶ <슈가 힐> <굿 로맨스>의 이송희일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