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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보는 <마리 이야기>
2001-12-29

디지털 애니메이션 <마리이야기>, 3년 작업 끝에 완성품 선보여

아마도 지금 이 순간은 그렇게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습관처럼 사무실 복도에서 자판기 커피를 홀짝이고, 비워진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던지다가 무심코 창가를 훑는 시야로 파고든 하얀 솜털눈의 군무에도 무감하게 망연자실할 뿐인 남우처럼. 눈 오는 거리를 이유없는 설렘으로 헤매던 기억이나 소설을 쓰고 싶었던 꿈 같은 건 가물가물, 기쁠 것도 슬플 것도 없는 감정의 진공상태로 식은 커피처럼 텁텁한 시간을 흘려보내면서 말이다. <마리이야기>는 그 무심한 시간의 창가를 조용히 두드리며 가슴의 진공관을 슬쩍 건드려오는 기억의 동화다.

함박눈을 뿌리는 잿빛 하늘을 날아 한강변에 줄지어선 도심의 콘크리트 숲 사이로 사뿐히 내려앉는 오프닝 장면의 갈매기처럼, 난데없이 일상의 틈새로 파고들며 잊고 있던 꿈의 체온을 전하는. 이제는 성인이 된 남우는 사무실 창 밖 나뭇가지에 앉은 갈매기를 보던 날 옛 친구 준호를 만나고, 잊혀졌던 어린 날의 추억을 다시 만난다. 바다에 둘러싸인 작은 어촌의 일상과, 낡은 등대에서 조우했던 그리운 비밀, 마리의 환상을. 그리고 책장 깊이 처박아둔 빛바랜 사진첩을 새삼 꺼내 보듯, 성장기의 소소한 꿈과 표정들을 한장 한장 되짚어가는 여행으로 이끄는 것이다.

<마리이야기>는 <연인> <덤불 속의 재> 등 컴퓨터애니메이션의 다양한 질감을 탐색하며 단편 작업을 해온 이성강 감독의 장편 데뷔작. 2D와 3D를 사용하되, 차갑거나 인공적인 컴퓨터그래픽의 질감을 최대한 배제하고 손맛이 배어나는 푸근한 이미지를 실험하는 디지털애니메이션이다. 99년 4월경에 나온 첫 데모부터 수려하면서도 완성도 높은 그림으로 주목을 받아온 <마리이야기>는 이미 여러 매체에 소개되며 화제를 모아왔다.

씨즈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하는 이 작품은 1월11일 개봉을 앞둔 현재, 더빙과 본편집, 믹싱까지 거의 모든 작업을 마치고 일부 장면의 이음새를 재고하는 편집과 좀더 만족스러운 사운드를 얻기 위한 마지막 손질을 하는 중이다. 약간의 변화는 있겠지만 최종에 가까운 편집본으로 미리 엿본 <마리이야기>는, 제작기간 3년이라는 기다림이 헛되지 않을 만큼의 미덕을 갖춘 듯 보였다.

이성강 감독의 단편들이 대부분 회화적인 표현력이 풍부한 이미지로 분열된 사회와 개인의 소외된 자아에 대한 고민을 드러낸 추상화에 가까웠다면, <마리이야기>는 바닷가 마을 소년의 성장에 대한 세밀한 풍경화에 가깝다. 횟집을 하는 할머니, 어머니와 살아가는 남우는 말수가 적은 사춘기 소년. 학교가 파하면 고양이 요와 어울려 놀거나 단짝인 준호와 바닷물에 몸을 담그곤 하는 남우의 하루하루는 평범하지만, 뱃사람인 아버지를 잃고 곧 서울로 전학갈 준호와도 헤어져야 하는 이별의 외로운 그늘을 안고 있다. 어느날 사라진 요를 찾아 등대에 들어간 남우는, 학교 앞 문방구에서 봤던 이상한 구슬을 발견한다. 구슬에 신비로운 빛이 감도는 순간 등대는 사라지고 푹신한 구름 아래로 환상의 문이 열린다. 물고기새를 타고 본 적 없는 낯선 숲으로 미끄러져 내린 남우의 코앞에 물끄러미 마주한 눈, 마리의 세계다. 온몸이 보드라운 털로 덮인 소녀 마리, 그리고 흰 구름처럼 커다랗고 폭신폭신한 개, 지느러미 대신 잠자리 같은 작은 날개를 퍼덕이는 물고기새들의 이상한 나라.

“환상이되 자연스럽게, 사람냄새 나되 구질구질하지 않게”

‘바닷속의 환상적인 아름다움과 우주 공간의 신비’를 컨셉으로 했다는 환상 세계의 풍광에 잠시 말을 잊는 것은 비단 남우만이 아닐 것이다. 하얀 실 같은 선으로 땅에 이어져 있다가 손이 닿으면 풍선처럼 떠오르는 작은 구름들, 기이한 산호초와 덩굴, 키를 한참 넘기는 풀숲 혹은 나무들, 그리고 다른 별에서 가져온 듯한 기암괴석까지 무채색과 분홍, 초록, 보라 계열로 연하게 채색된 이 공간은 신비로운 상상의 화원이다. 환각인지 꿈인지 모호한 세계를 몇 차례 드나드는 동안, 마리와의 만남은 외로운 소년의 속내를 다독이는 첫사랑의 설렘으로, 위안의 속삭임으로 다가온다. 마리는 남우의 꿈이고, 환상이고,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다. 말 한마디 없이 그저 남우를 바라보고 한번 얼굴을 쓰다듬을 뿐인 마리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아무것도 분명하지 않지만, 명료하지 않아서 더 그리운 잔상을 남기는 존재랄까.

생각보다는 짤막한 판타지가 아쉬우면서도 여운을 곱씹게 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사소한 구석까지 세밀하게 묘사되는 일상의 풍경들 때문이다. 바닷물에 슬쩍 앞발을 들이미는 고양이 요의 애교스런 동작 하나하나, 목욕탕에서 물장난을 치며 옆의 아저씨에게 물을 튀기고, 짝사랑하는 왈가닥 여자애를 위해 이불을 뒤집어쓴 채 쪽지를 끼적이며, 모기장 안에서 밤늦도록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아이들의 생기, 고기잡이를 마치고 돌아와 배를 비우고 지나는 손님을 횟집으로 끄는 이웃들의 모습. 혹은 한강변과 서울 도심의 사무실, 교실 뒤편 ‘환경미화용’ 초록색 부직포에 그림을 걸어둔 학교, 버스나 시장 같은 사실적인 공간에 대한 오밀조밀한 묘사를 보고 있자면, 우리가 몸담고 있는 풍경을 이처럼 세심하게 잡아낸 애니메이션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로봇들의 대전과 함께 지구의 미래를 근심하거나 미소년, 미소녀들의 현란한 무용담을 지켜보는 사이 증발해버리곤 하던 삶의 자잘한 체취들 말이다.

“환상은 환상이지만, 꼭 누구랑 싸우고 뭘 해야 하는 식의 모험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목적의식이 없는, 일상에서 스치듯 만나는 환상”을 담고 싶었다는 이성강 감독의 말처럼, <마리이야기>는 사람냄새 나는 일상을 축으로 살짝 환상을 얹어놓았다. 다만 소년의 눈으로 돌아보는 일상이 너무 구질구질하지 않은 동화의 느낌으로, 일상의 구체성을 딛고 선 판타지가 조금 일찍 깨어버린 꿈 같은 아쉬움으로 남도록 말이다.

일상의 리얼리티를 살리면서 판타지를 한 품에 아우르기 위해, 이성강 감독이 세명의 작가를 거치며 <마리이야기>의 시나리오에 매달린 기간만 1년. 애초 3편의 단편 옴니버스로 구상했을 때는 탐험가가 숲에서 만난 마리를 둘러싼 판타지가 좀더 강했지만, 하나의 이야기로 엮는 동안 탐험가는 남우로, 숲은 좀더 일상에 가까운 공간인 어촌으로 바뀌었다. 꼼꼼히 콘티를 그린 뒤, 서울 백련사 부근의 주택가와 감포 바닷가 등 실제 장소, 실제 배우들의 연기를 촬영해서 그렸다는 배경과 인물은 자연스러운 실감을 지니고 있다. 특히 햇빛에 그을린 피부에 평범한 외모를 지닌 인물들의 사실성은 캐릭터 사업을 고려한 다수 애니메이션 주인공들의 미모와는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시도인 동시에 관객의 취향을 앞서가는 모험수로 비치기도 한다. 표정이 매우 절제된 터라 감정이입의 여지가 적다는 것도 약점이랄 수 있지만, 결코 호들갑을 떨거나 과장하는 법 없이 담담하게 극을 끌어가고자 하는 감독의 연출리듬을 감안하면 의도한 선택인지도 모른다.

창작 애니메이션 제작의 ‘모범사례’가 될 것인가

발문: 3차원의 이미지를 일일이 재손질한 배경은 입체적이면서도 손으로 그린 듯한 부드러움이 살아 있다. 플래시 등으로 2D 인물들을 그린 뒤 윤곽선을 지워감으로써 배경과 동떨어져 보이지 않도록 한 것도 눈에 띄는 시도. 무엇보다도 어떤 색이라고 이름짓기 난감할 만큼 미묘한 채도의 변화를 담아낸 색감의 팔레트는 좀처럼 볼 수 없던 은은한 아름다움으로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는다.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의 깜찍한 캐릭터나 역동적인 애니메이팅도, 일본 아니메의 정교한 메카닉 설정이나 미소년, 미소녀 캐릭터도 없고, 특별한 ‘사건’이 없는 <마리이야기>에서 최고의 장관은 이미지 그 자체다. 컴퓨터애니메이션이라면 <슈렉> 같은 입체의 질감에 익숙한 우리에게, <마리이야기>는 유화와 수채화의 경계에 선 낯선 이미지의 실험을 보여준다. 3D 맥스로 만들어낸 3차원의 이미지를, 인상파의 그림처럼 회화적인 터치를 살려주는 페인터와 포토샵의 2D로 일일이 재손질한 배경은 입체적이면서도 손으로 그린 듯한 부드러움이 살아 있다. 플래시 등으로 2D 인물들을 그린 뒤 윤곽선을 지워감으로써 배경과 동떨어져 보이지 않도록 한 것도 눈에 띄는 시도. 무엇보다도 어떤 색이라고 이름짓기 난감할 만큼 미묘한 채도의 변화를 담아낸 색감의 팔레트는 좀처럼 볼 수 없던 은은한 아름다움으로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는다.

환상의 세계는 물론, 저녁 무렵의 하늘과 풀밭이 다양한 채도의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다거나 바다가 연한 하늘빛부터 청록빛, 남빛, 청회색, 블루블랙 등으로 표정을 바꾸는 일상의 세계도 기존 애니메이션에서 찾아보기 힘든 풍요로운 색채의 향연을 펼쳐 보인다. 흰색과 회색을 섞어 자극적인 원색 대신 푸근한 파스텔톤을 추구한 색감은, 아이들의 얼굴과 책가방에 어리는 나뭇잎 그림자와 달빛까지 포착한 세심한 조명과 함께 <마리이야기>의 몽상적인 이미지에 주효하다. 15인조 현악 스트링 앙상블의 선율, 클래식 기타와 피아노, 목관 악기의 부드러운 서정과 신시사이저의 몽롱한 음색으로 화면을 감싸는 이병우씨의 음악도 힘을 실어준다.

초당 24프레임도, 8프레임도 아닌 12프레임의 속도로, 좀처럼 서두르지 않으면서 차근한 호흡으로 들려주는 성장의 동화나 아름답지만 소박한 판타지가, 속도감과 극적인 이벤트에 익숙한 관객에게 혹 밋밋하게 여겨질지 모른다는 우려도 든다. 하지만 무미한 현재의 틈바구니에서 잠깐 벗어나 종종걸음을 늦춘다면, 잊고 싶지 않았던 것들을 되돌아보는 79분간의 여행에 즐겁게 동참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구나 한번쯤은 지나왔을 생의 한때, 그 속에 묻어둔 보물 같은 기억을 불러내는 이미지의 마법은 오랜만에 꾸는 단꿈과 같다. 좀더 많은 관객이 그 꿈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그래서 21억원의 실제작비로 꼼꼼한 기획부터 어린이 회관이 아닌 극장 배급에 이르기까지 모범적인 제작공정과 작가의 개성으로 빚어낸 <마리이야기>가 국산 창작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시작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글 황혜림 blauex@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