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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2002년 기대작 [4] - 변영주 감독의 <밀회>
이영진 2002-01-04

마른 땅 적시는 사랑

“나이 들어서 하는 연애인데, 성공해야죠.”

변영주 감독이 목하 ‘열애’중이다. 그런데 상대가 바뀌었다. 서너달 전만 하더라도 유괴를 소재로 한 <피크닉>이었는데, 지금은 ‘멜로’영화 <밀회>에 빠져 있다. 사실, 동지이자 단짝인 신혜은 프로듀서가 “이거 한번 해보자”고 했을 때만 해도, 그는 일언지하에 싫다고 거절했다. 원작인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은 99년 다큐멘터리 <숨결>을 완성할 무렵, 읽고서 “영화 하면 죽이겠다”고 호언한 소설이었지만, 아무래도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도 그렇고, 내가 찍어온 다큐 속 할머니들도 다들 뿜어내는 발산적인 캐릭터인데, 소설 속 주인공은 정반대로 삭이고 수렴하는 인물이라 쉽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다.”

그렇다면, <피크닉>을 연기하고, <밀회>를 즐기기로 맘먹은 이유는 뭘까. 그의 ‘변심’은 어쩌다 나간 동창회에서 시작됐다. “대학 졸업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그렇게 평범하게 살고 있는 친구를 20년 만에 봤는데,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저 친구도 나랑 똑같이 세상과 싸우면서 버텨왔구나 싶더라.” 남편의 불륜으로 인해 처음엔 모든 것이 무너졌다고 망연자실해하지만, 결국 지금까지 자신이 갇혀 살아왔음을 자각하게 되는 30대 초반의 주부 미흔에게 마음이 가닿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난 지금도 스크루지 영감이 나오는 동화 <크리스마스 선물>을 떠올리면 무섭다. 과거, 현재, 미래의 자기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본다는 이야기에는 호기심 이전에 두려움 같은 게 든다. 이번 영화도 그런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다. 머물러 있고, 갇혀 있던 미흔이 규라는 인물을 만나면서 이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의외의 선택을 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자기가 몰랐던 어떤 이면의 모습을 알게 되는 과정을 쭉 따라갈 생각이다.”

현재 ‘보존과 폐기의 법칙’을 적용, 각색을 마친 시나리오는 원작의 에피소드를 좀 줄이고, 미흔이 본능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남자 규의 직업을 바꾸고 비중을 높이는 정도로 마무리가 된 상태. 대신 원작이 주인공인 미흔의 심리적 내레이션이 주가 되는 터라 영화에선 이를 대신할 만한 공간이나 이미지를 찾는 데 주력하고 있다. 요즘 “바다가 아니라 흡사 늪과 같은 느낌의” 남해에서 낮엔 자판기 커피와 밤엔 소주에 의지, 권혁준 촬영감독과 함께 종일 햇빛, 바람 등을 체크하며 헌팅에 몰두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변영주 감독이 멜로영화를?”이라고 놀라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들 또한 결과물에 대한 기대가 높다. 감독의 각오 또한 그에 못지않다. 그는 여성적인 시선과 목소리로 사물을 보고 느낌을 표현하되, 이론이나 비평을 위한 여성주의 대신 통속성을 공격적으로 수용한 원작의 장점을 잘 살려, 대중적인 호소력이 있는 ‘우리 시대, 멜로영화’를 내놓겠다고 말한다. “연애라는 건 누군가를 사랑하고 책임을 부여받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내가 선택한, 어떤 극대화된 감정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걸 통해 살아 있다는 걸 느낀다. 영화 속 인물들은 더 그렇다. 특히 그들의 사랑은 상대의 불행이 자신에게 유혹으로 다가온 경우다.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미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사랑을 나눈다. 열정을 거세당하고 일찍 늙어버린, 30대 내 또래 관객이 보고서 안타까워하는 영화였으면 좋겠다.”

어떤 영화

행복은 무지의 다른 이름이었을까. 갓 서른살을 넘긴 전업주부 미흔은 성탄 전야에 한 여자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남편 효경의 직장 후배이며, 영우라는 이름을 가진 20대 여자는 할말이 있다며 집을 방문해도 되겠느냐 묻고, 별 생각없이 응낙한 미흔은 이어 효경, 영우와 함께 어색한 술자리를 갖는다. 그러나 만취한 영우는 불쑥 효경에게 자신을 재워달라고 애원하고, 어처구니없어하는 미흔에게 자신은 효경과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말한다. 그 일이 있은 지 2년. 미흔은 효경을 따라 시골로 이사하지만, 여전히 두통과 불면에 시달린다. 그렇게 점점 말라가던 어느날, 미흔은 우연히 의사 규를 만나게 되고, 그의 향기를 맡고 생의 기운을 되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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