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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영화]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사냥>
2002-01-10

폭력과 쾌락의 이중주

La Caza 1965년, 감독 카를로스 사우라 출연 이스마엘 메를로 1월12일(토) 밤 10시

사내 몇명이 황량한 벌판으로 걸어온다. 이들은 총을 한 자루씩 들고 있다. 카우보이인가? 그렇진 않다. 총을 장전한 남자들은 뭔가 표적을 향해 방아쇠를 열심히 당긴다. 의외로, 총탄을 맞고 땅 위를 뒹구는 건 작은 토끼들이다. 더운 여름날 살육의 잔치를 벌이듯 남자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토끼를 쏴죽인다. 차츰 이성을 잃어가는 그들은 곤충에서 동물들, 그리고 마지막엔 가까운 동료까지 희생양으로 삼는다. 폭력의 극단까지 거침없이 나아간다. <사냥>은 할리우드 서부극에서 폭력적인 코드만을 옮겨놓은 듯한 영화다. <와일드 번치>(1969)로 수정주의 서부극의 전범을 만든 샘 페킨파 감독은 <사냥>을 “연출생활에 있어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꼽은 바 있다. 그만큼 영화에서 폭력에 관한 묘사는 밀도와 잔혹성이 소름끼칠 정도다.

내전에 참전했던 호세는 친구인 파코 등을 초대해 토끼사냥에 나선다. 동업자인 루이스, 그리고 나이 어린 엔리케 등이 동행한다. 한때 전쟁터였던 곳에서 남자들은 사냥을 시작한다. 언덕에 천막을 친 호세 일행은 더위와 목마름 속에서 차츰 정신을 잃어가고 광기에 사로잡힌다. 일행 사이엔 어느새 긴장감이 감돌고, 엔리케는 사람들의 난폭한 언행에 두려움을 느낀다. 토끼사냥은 인간끼리의 사냥으로 변질된다. 1960년대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은 영화에 비유와 암시를 즐겨 깔아놓곤 했다. 폭압적인 정권의 영화검열과 간섭을 피하는 방법으로 비유적인 내용으로 영화를 포장한 셈. <사냥>에서도 감독은 토끼사냥에 몰입하는 무리를 통해 스페인 내전의 비극적인 역사, 그리고 당시 스페인 사회의 도덕적 붕괴의 양상을 고찰한다. 영화 속 캐릭터들은 양심의 가책이라곤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살육을 즐기면서 쾌락에 몸을 담근다. 비슷한 시기 감독의 영화는 구조적으로 정밀한, 즉 꿈과 현실이 혼재하고 현재와 과거 시제가 뒤섞이는 등 복잡한 형식을 취하곤 했지만 <사냥>에서 극의 짜임새는 정연하고 깔끔하다. 대신 영화에서 동물들이 고통받는 장면은 끝까지 지켜보기 힘들 정도로 충격적이다.

<사냥>은 철저한 경멸과 증오의 영화다. 사냥군들은 거의 실성한 채 총을 난사하고, 토끼들은 차례로 죽어간다. 사우라 감독은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팬 기법, 그리고 줌렌즈 등을 이용해 정서적인 놀라움을 안겨준다. 날이 더워질수록 사냥군들은 더욱 난폭해지는데 이에 맞춰 카메라 움직임은 기민해지고, 편집속도 역시 걸음을 재촉한다. 영화음악은 행진곡 같은 박자로 웅장하게 울려퍼진다. 의미심장한 정치적 은유를 숨겨놓은 채 영화는 아무런 동정이나 감정이입 없이 지옥의 풍경을 펼쳐보이고 있다. <사냥>은 끔찍한 영화지만 말미에 약간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긴 한다. 그럼에도 무작정 즐기기에도, 명료한 메시지를 발견하기에도 어색한 구석이 있는 건 사실이다. 어찌됐건 새로운 ‘폭력영화’의 장을 여는 출발점이 되었다는 것이 <사냥>의 사적 의미는 아닐는지. 김의찬/ 영화평론가 sozinh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