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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 렐름>
2002-01-10

농부의 눈으로 전쟁을 보라

<배틀 렐름>은 <커맨드 앤 컨커>나 <울티마9>를 제작하는 데 참여했던 베테랑 게임 제작자들이 모여 만든 ‘리퀴드 엔터테인먼트’의 첫 번째 작품이다. 지금까지의 3D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밀하고 아름다운 그래픽을 보여준다. 게임의 배경은 가상의 일본사회다. 드래곤, 서펀트, 울프, 로터스의 네 클랜이 각자의 운명의 길을 따라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이 게임에서 나는 농부 하나를 만났다.

햇볕이 따갑다. 물이 필요하다. 메마른 논에서 새카맣게 타고 있는 벼를 위해, 운좋게 영주의 눈에 들어 도장에서 훈련받고 있는 옆집 아들래미를 위해 물을 길어와야 한다. 마을에 하나밖에 없던 우물은 적의 공격으로 파괴된 지 오래다. 감시탑을 세워놓고 더이상의 공격이 없도록 대비하고 있지만 물이 없어서는 오래 버틸 수 없다. 우물쭈물하고 있는 동안에도 적은 계속 병력을 길러내고 훈련시키고 있다.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더 힘들어진다.

물을 길어오는 건, 나 같은 농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허리가 끊어지도록 밭을 매고,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히도록 물을 길어온 농부만이 할 수 있다. 자기 키보다 더 큰 칼을 휘두르는 드래곤 워리어, 오랜 수련 끝에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사무라이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적에게 불구슬을 퍼붓는 아름다운 게이샤도, 모든 것의 근원인 물 한 동이 길어오는 일은 할 수 없다.

두렵지만 가야 한다. 언덕을 내려가 강줄기를 찾아서 한달음에 내달린다. 적에게 점령당한 지역이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다행히 병사들은 보이지 않는다. 피비린내나는 전장에 어울리지 않게 평화로운 농가와 허리 한번 못 펴고 벼를 베고 있는 농부들뿐이다. 나를 힐끗 보고는 묵묵히 낫질로 돌아간다. 물을 길어야만 하는 내 처지를 이해하는 것인지, 아니면 시키는 일말고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전쟁터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농부에게 해피 엔딩은 없다. 물통을 막 강물에 담그려는데 병사 하나가 오고 있다. 무시무시한 칼을 들고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다. 벌써 이쪽을 본 눈치다. 굽은 허리에 물통을 든 농부쯤이야 열이든 스물이든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빙긋 웃는 표정에 적의는 없어 보인다. 그 역시 집에는 농부로 태어난 부모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여기는 전쟁터다. 내가 길어간 물은 그의 목을 베는 칼날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나에게 손을 쓰는 것말고는 선택의 여지는 없다.

모든 걸 포기하고 나자 눈과 머리가 맑아진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들이 한꺼번에 펼쳐진다. 누추한 농가에서 태어나 시키는 대로 건물을 세우고 농사를 짓고 야생마가 보이면 길들여서 마구간으로 데려오기도 했다. 틈틈이 주저앉아 삿갓을 벗어 부채질을 하며 쉬는 게 유일한 낙이다. 하지만 영주는 어김없이 호통을 친다. 그러면 다들 불평없이 일어서서 하던 일을 계속한다. 운좋게도 병사로 뽑히기라도 하면 고된 노동에서는 벗어나겠지만 그들의 눈빛도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잠시 뒤면 나는 쓰러질 것이고, 우리 진영에서는 다시 다른 농부를 보낼 것이다. 병사는 칼날에 묻는 내 피를 씻어낼 틈도 없이 다시 달려들 것이고,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농부들은 왔다가는 다시 쓰러질 것이다. 이 전쟁이 무슨 이유로 시작되었는지, 여기서 이기고 나면 이번에는 어디로 갈 것인지, 여기서 쓰러지는 우리 중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