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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반공영화상의 아이러니, <짝코>
2002-01-16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쩔 수 없이 닥치는 대로 보게 되는 영화들이 있다. 하는 일과 상관있는 영화들로서 주로 시사회를 통해서 보게 된다. 체질적으로 영화 보기를 중간에 그만둬버리지는 않는 성격이고, 그나마 휴대폰 꺼놓고 누구로부터도 방해받지 않는 혼자만의 휴식시간 같기도 하고, 어떤 영화라도 음미할 만한 약간의 미덕은 지니고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부터 시시한 느낌이 들더라도 끝까지 있어본다. 기대없이 보기 시작했다가 몰입할 만한 근사한 영화라도 만나면 그날은 이른바 횡재라도 한 듯 흐뭇하고 뿌듯하다. 그런데 거슬러 올라가보면 영화일에 종사하기 이전에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영화를 보는 ‘행사’들은 꽤 있었다. 학창 시절에 단체관람이라는 이름 아래 본 그렇고 그런 영화들이 가끔씩 떠오르면 쓴웃음이 난다.

대학교 일학년 때의 교련시간이었다. 비가 와서인지 원래 그런 프로그램이 있었던 것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를 보여준다고 대형강의실에 모여서 영화를 한편 보게 되었다. 강의실 문에 써 붙여놓은 안내문, ‘반공영화감상, 제목 짝코.’ “짝코? 웬 짝코? 코가 두개인 사람도 있어 코가 짝짝이게.” 강의실을 들어서며 이런 비웃음 섞인 혼잣말을 했었을 것이다, 아마도. “한국영화, 게다가 반공영화? 잠이나 자지. 그래 총검술을 하는 것보단 낫겠지.” 대부분의 반응이었을 것이다. 영화는 시작되었다. 분명히 그리 좋은 감상 분위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단체관람이 으레 그렇듯이 산만한 동료들이 정말로 산만하게 움직이는 법이고 정사신이라도 나오면 괴성이 튀어나온다든지….

영화가 끝났다. 참 어리둥절했다. 반공영화라고 보았는데 그렇지 않아서? 아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깊은 감동과 경이감으로.

6·25전쟁이 끝나갈 무렵 전투경찰대 출신으로 빨갱이를 잘 잡기로 이름난 송기열 경사는 짝코로 악명 높던 백공산을 잡아 호송하던 도중 그를 놓친다. 송경사는 짝코에게 뇌물을 받고 그를 놓아주었다는 혐의를 받아 제복을 벗게 된다. 송기열은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짝코의 뒤를 쫓는다. 그 바람에 그가 가정을 돌보지 못해서 아들은 병들어 죽고 아내는 화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이것은 백공산에 대한 저주로 변하고 그것은 광기의 차원에까지 이른다. 영화는 갱생원에서 두 인물이 나이 들고 병들어 만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대결의 본질은 이념이 아니다. 그들은 적(敵)도 아(我)도 아니다. 그들에겐 증오의 추적과 공포의 도피만이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한없이 느껴지는 연민. 새로운 도전이라 생각되었다. 충격적이었다, 반공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시기였음을 감안한다면 더욱이. 그당시의 6·25전쟁을 다룬 영화? 많이 있었던 것 같다, 반공영화라는 이름으로. 당시에 볼 만한 전쟁 관련의 그 무엇이라면 소설들 중에 최인훈의 <광장>이나 황석영의 <한씨년대기>가 대표적이었고, 즐기자면 이병주의 <지리산>을 보는 것이 전부였던 때였다. 이러한 ‘짝코’가 대종상 우수반공영화상을 받았었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짝코’를 처음 본 그때로부터 대략 10년쯤 지난 어느 때에, 그때는 영화 일을 시작한 뒤일 텐데, 다시 ‘짝코’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왜 그 영화를 그렇게 인상적으로 보았었는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앞서 언급한 전쟁에 대한 새로운 시각 이외에도 형식미에서 그 비결을 발견했었다. 늙고 병들 때까지도 쫓고 쫓겨야 하는 추적자와 도망자의 평생의 악연을 회상형식으로 전개해나가는데, 두 사람이 함께 겪었던 동일 상황을 두 사람 각각의 다른 시점으로 교차하는 방식이나 회상의 시간순서를 효과적으로 바꾸어 긴장감을 유지하는 방식 등을 채용하고 있다는 면에서 다시 보는 그 시점에서도 놀랄 만했다. 그리고 만든 이들의 무게를 확인했었다. 각색 송길한, 촬영 구중모, 음악 김영동…. 그 이후로 만났던 임권택 감독의 비슷한 주제의 영화 중에서 <길소뜸> 에서 한번 더 감동을 했었지만 ‘짝코’에 비길 만할까 싶고 <태백산맥>에서는 상대적인 허전함마저 느꼈었던 것 같다.

이 글을 마치면서 드는 감회는 교련수업을 듣지 않아서 그 ‘반공영화’를 놓쳤던 당시의 여학생 학우들이 안됐다는 안타까움, 그 ‘반공영화’를 선택한 교련 교관의 정체에 대한 궁금함, 그리고 20살 청춘에 대한 그리움이다.

글: 최용배/ 영화사 청어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