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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이야기> O.S.T
2002-01-24

추억을 부르고 환상이 되는 음률

마리는 기본적으로는 주인공 남우로 대표된 사춘기 시작 무렵의 아이가 가질 수 있는 성적 환상의 상징이다. 그 시절의 마리는 아직은 있는 그대로 가질 수 없으므로 일종의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가진 뒤의 마리보다 가지기 전의 마리가 그래서 더 안타깝고 아름답다. 그 마리는, 구슬 속에 들어 있는 신비스러운 마리는, 불빛으로 잠깐 왔다가 간다. 마리는 꿈속에 있다. 아니, 차라리 꿈이 마리다. 감독은 그러한 십대 소년의 환상을 환상의 공간에 붕 띄우기보다는 현실에 좀더 밀착시키려 한다. 마리는 아버지를 풍랑으로 잃은 바닷가 소년의 우울함 속에, 그 우울함을 기억하는 불알친구 준호의 떠남 속에, 그리고 그들의 기억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은밀한 추억의 공간인 낡은 등대의 불빛 속에 배치된다. 그렇게 되면서 그 환상은 희망이 되는데, 감독은 그 둘, 그러니까 환상과 일상적인 희망을 연결시키는 일에 많이 공을 들인 것 같다.

내게는 아직도 듀엣 ‘어떤 날’의 기타리스트로 각인되어 있는 이병우가 이 O.S.T의 음악을 맡았다. ‘어떤 날’의 음악은 확실히 우리 포크 계열 음악의 한획을 그은 음악이었다. 포크의 일상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거기에 좀더 섬세하게 짜인, 미학적인 세련미를 심었다. 이병우의 기타 라인들이 그 중요한 일부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어떤 날’ 이후 외국으로 나가 클래시컬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지만, 여전히 음악적 뿌리는 ‘어떤 날’ 시절의 서정성에 두고 있다. 이번 O.S.T에서도 그러한 점이 많이 발견된다. 특히 도입 화면에 붙인, 유희열의 스켓과 함께 흐르는 음악이 그렇다. 개방현과 하이 포지션의 분해 코드를 이용하는 풍부한 울림의 아르페지오가 코드 라인을 만들어간다. 옛날 이병우의 선이 역력하다.

그러나 그에게 그것만 있는 건 아니다. 그런 분위기가 일상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면 리버브와 딜레이를 아낌없이 준 신시사이저의 사용을 통해 환상적인 분위기가 그려진다. 또한 15인조 실내 앙상블의 미려한 스트링 선율이 격조를 더한다. 이병우의 음악적 동반자라고 하는 신이경의 피아노가 구슬처럼 튀긴다. 재미 연주가인 박윤의 퍼커션이 긴박감을 부여하고 환상 속에 현실로 존재하는 마리이야기에 더 은밀하고 이국적인 색채가 부여된다. 가끔씩 장면 전환을 따라가는 호흡이 전문 영화음악가의 그것보다 거칠게 느껴지는 대목이 보이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흐름도 무리없이 잡아내고 있다.

엔딩 스크롤이 흐를 때에는 요즘 잘 나가는 성시경이 <마리이야기>라 제목이 붙은 주제가를 부른다. 이 노래는 O.S.T 전체 분위기를 짬뽕시켜놓은 듯한 느낌이다. 기타 선율에 환상적인 신시사이저에 명쾌한 피아노에 흐름에 따라 약간은 드럼 앤 베이스를 연상시키는, 그러나 그보다는 가볍고 상쾌한 기분으로 프로그래밍된 리듬 파트 등등. O.S.T에는 프롤로그, 예고편 테마를 합쳐 모두 18트랙이 들어 있다. 선곡된 음악이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진 음악들만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O.S.T 음반에서 어떤 일관성 같은 걸 감지할 수 있어 좋다.

특히 환상적인 장면들에서 <이웃집 토토로>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어떤 부분을 연상시키는 대목이 보이긴 하지만, 애니메이션 특유의 환상성을 리얼한 우리 현실의 모사과정 속에 위치시켰다는 건 분명히 이 영화의 미덕이다. 이병우의 잔잔함은 거기에 걸맞은 음악적 분위기를 제공하고 있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