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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구를 보는 세개의 시선 [2] - 김소희 ①

영화평론으로 먹고 사는 김소희의 설경구론

저 눈동자가, 우리를 사막으로 몰고가네

이런 상상을 해본다. 한국사람 모두가 하얀 종이 한장씩 펴들고 앉아 사람 얼굴을 그리는 거다. 자화상이라고 해도 좋겠다. 그려진 얼굴들을 울트라 슈퍼 컴퓨터에 불러들여 평균을 내보자. 작업의 목적은 성형수술용 골상학 연구가 아니라, 얼굴들이 드러내는 인간 감정의 집단적 초상을 얻는 데 있다. 만약 이 일을 1980년대에 했다면 그 결과는 배우 안성기의 얼굴에, 그리고 지금 해본다면 배우 설경구의 얼굴에 가깝지 않을까.

영화 <공공의 적>을 보았을 때 두 가지 소회가 진하게 들었다. 하나는 ‘한국 영화산업의 파워 1위’로 인정받는 강우석 감독이 재능과 윤리면에서도 1등이 되고 싶어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설경구가 <박하사탕>에 이어 <공공의 적>을 통해 시대의 얼굴로 등극하고 있다는 경탄이었다.

얼굴은 흔히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시대에 관해 많은 것을 진술한다. 기원전 2500년경에 만들어진 ‘가부좌의 서생(書生)’의 크고 검은 눈, 옆으로 앙다문 입술, 각진 턱선은 고대 이집트의 문명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게 해준다.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라는 작은 그림으로부터 17세기 네덜란드의 경제와 종교, 신분제와 성도덕에 관한 초상화를 뽑아낸 소설가도 있다.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에 등장하는 앳되고 청신한 미인의 얼굴을 대면하고 있자면, 화려한 르네상스기를 막 지나 급전직하를 목전에 둔 후기 조선사회의 난만하고 에로틱한 분위기에 빨려든다. 20세기에 들어서자 스크린이 캔버스를 대신했고, 수많은 스타의 얼굴이 그 위에 명멸했다. 21세기의 전환기에 우리는 설경구를 바로 그런 ‘얼굴’로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오발탄>의 영호, <박하사탕>의 영호

설경구가 처음 영화에 얼굴을 내민 것은 1995년작 <꽃잎>(감독 장선우)이다. 연기라는 걸 해볼 여지조차 없는 작은 배역에, 그 스스로도 카메라를 두려워하는 흔적이 역력한 단역 데뷔작이다. 다음 영화 <러브 스토리>(1996, 감독 배창호)에서도 제대로 안 보이기는 마찬가지인데, 여기서 그가 얻은 배역의 이름이 ‘영호’라는 것 정도가 우연치고는 의미심장하다.

몇년 뒤 <박하사탕>에서 연기하게 되는 김영호는 <오발탄>에서 시대와 철저하게 불화하며 자기파멸의 길로 치달았던 인물과 이름이 같다. 한국영화 사상 최고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오발탄>에서 온 가족의 책임을 떠맡은 채 비척거리다 갈 길을 잃어버린 철호(김진규)가 유현목 감독의 이성적 자아라면,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 자존심과 낭만적인 연애행각에다 은행을 털고 권총을 쏘아대기까지 하는 영호(최무룡)는 감독의 격정적인 자아에 가깝다. 최무룡과 설경구가 그려낸 두명의 영호는 제각각 1961년과 1999년의 한국인을 대변하는 어떤 초상화다.

단역 시절의 설경구는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낯선 여자에게 데이트 신청해놓고 덕수궁 앞에서 기다리는 구애자(<처녀들의 저녁식사>), 상사 앞에서 군기가 바짝 든 목소리로 브리핑하면서 원리원칙 밝히는 잠수함 승무원(<유령>) 등을 연기했다. 최근작 <공공의 적>까지 포함해서 8년 동안 도합 10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니, “한번에 하나씩만 한다”는 소신을 단역 시절에도 지켰던 것일까.

<송어>(1999, 감독 박종원)는 그가 처음으로 얼마간의 캐릭터를 형성할 여유를 가진 작품이다. 서울 사는 월급쟁이 현수는 여름 휴가차 부부 동반으로 산 속에서 송어 양식장을 하는 친구를 찾아간다. 두세쌍의 남녀와 기이하게 고립되어 있던 산사람이 한데 모이자 추억과 질투, 호기심 등 갖가지 계기로 에로티시즘이 분출하고, 의식의 밑바닥에 있던 폭력성과 비굴함, 이기심도 무성하게 솟아오른다. 휴가를 마치고 서울로 진입할 무렵이 되자 도시인들은 다시 예의 그 무덤덤하고 냉정한 얼굴을 되찾는다. 설경구는 이같은 드라마의 흐름 한가운데에 위치한 채 무난하게 상황을 수행한다. 그러나 여러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인데다 후반부를 제외하고는 카메라가 대부분 다른 배우들의 얼굴에 집중하기 때문에 설경구가 그다지 두드러져 보이지는 않는다.

뒤이어 그의 출세작인 <박하사탕>(감독 이창동)이 선보였다. 폐인이 되어 말을 잃어버린 채 절규만이 남은 영호가 온몸을 비칠거리며 알 듯 모를 듯 “안 돼”라는 말을 웅얼거린다. 마침내 달려오는 기차를 등진 채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울부짖는 얼굴의 커다란 정지화면은 영화 <박하사탕>의 에너지를 응축한 대표 장면으로 모두에게 기억된다. 이 장면은 클로즈업의 위력을 새삼 환기시켰다.

복합적으로 움직이는 표정

사실 클로즈업이야말로 영화를 다른 모든 매체와 구별짓는 표현기법으로, 인물의 얼굴을 통해 우리의 감수성을 사로잡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영화가 연극의 사진화라는 굴레를 탈피하여 독자적인 예술로 발전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앙드레 말로, <상상의 박물관>). 그렇다면 우리가 한국영화를 볼 때 가끔 심심하다고 느끼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클로즈업을 감당할 수 있는 배우가 많지 않다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얼굴 근육 한두개를 움직여 조합해낸 두세개의 표정만으로 영화 한편을 해치우는 연기자의 클로즈업은 보는 이를 심리적으로 불안하게 만든다. 그에 비해 설경구의 얼굴 요소들은 상당히 복합적으로 움직이고, 표현의 범위도 자연스레 커진다.

<박하사탕>은 한 인물의 내면을 상처 입혀 부패시키고 삶의 토대마저 차례로 무너뜨린 외적인 환경 조건을 차근차근 추궁해나간다. 이창동 감독은 영호라는 인물이 순진하고 아늑한 유년으로부터 폭력적인 방식으로 튕겨져나온 최종적인 계기를 1980년 5월의 광주학살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설정한다. 그러므로 사건 이전과 이후는 자연히 무염(無染)의 순수와 가속화되는 타락으로 구별된다.

1999년의 한국인이 안고 있던 개인적·집단적 내상(trauma)의 원인을 하나의 역사적 사건에 소급시켜 해명한 이 영화의 서사는, 감독이 의도했든 아니든 당시의 정치적 기류와 밀접하게 조응한다. 50년 만의 정권교체라고 자임했던 김대중 정부의 등극이 과연 광주항쟁에 대해 한국인들이 갖고 있던 집단적 부채의식 없이 가능했을까. 이러한 사회적 맥락에 기초한 <박하사탕>의 드라마를 설경구의 연기력이 기막히게 뒷받침함으로써 이창동 감독은 김대중 정부로 상징되는 특정한 정치적 시기에 ‘계관시인’으로 등극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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