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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 투영된 민족주의
2002-02-07

사이버월드에도 국경은 있다?

디지털 시대에 민족주의만큼 시대착오적인 것은 없어보인다. 인터넷 서핑에는 국경이 없다. 키보드와 모니터만으로 세계 어느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든 실시간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가장 디지털적 엔터테인먼트인 ‘전자오락’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영어나 일본어로 된 게임을 자막없이 플레이하는 게이머에게, 민족주의는 정말 어불성설이다. 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재미있냐 아니냐지 어느 나라에서 만들어졌냐가 아니다.

하지만 게임에도 ‘민족’은 존재한다. 서양과 동양을 각각 대표하는 미국게임과 일본게임을 보면 차이가 확연하다. 미남, 미녀가 주인공인 거야 어느 나라 게임이나 마찬가지지만 그 기준이 참 다르다. 동양에서도 미인의 기준이 서구지향적으로 되고 있다지만 게임을 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 미국 롤플레잉 게임의 히로인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입술은 두툼하다. 떡 벌어진 X자형 체격에 표정은 자신만만하다. 반면 일본게임 히로인은 동양인답지 않게 커다란 눈과 가슴을 가졌지만 팔다리가 가늘고 어깨는 좁다. 입은 조그맣고 눈썹은 가늘다. 어떤 나라의 게임을 얼마나 오랫동안 플레이하느냐에 따라서 미에 대한 기준이 바뀔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제작한 나라의 색깔이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건 역시 에듀테인먼트 장르다. 에듀테인먼트란 에듀케이션과 엔터테인먼트를 합쳐 만든 신조어다. 유희를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교육적 효과까지 노리는 콘텐츠가 에듀테인먼트다. 요즘 아이들이라면 ‘망까기’와 ‘고무줄’보다야 TV와 오락실을 더 좋아한다. 에듀테인먼트 게임은 에듀테인먼트 분야에서도 가장 전망이 밝다. 특히 최근 들어 게임에 대한 인식이 전반적으로 높아지면서 에듀테인먼트 게임에 대한 수요는 놀라울 정도다. 패키지 게임 시장이 거의 죽었다고들 하지만 매장마다 에듀테인먼트 게임은 쉴새없이 팔려나가고 있다.

가장 많이 팔려나가는 건 미국게임인 <아이 스파이> 시리즈다. 디즈니 가족영화 같은 데 보면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I Spy …”라고 말하면서 물건이나 사람의 명칭을 알아맞히는 놀이를 하는 것이 자주 나온다. 이 놀이를 게임으로 만든 게 <아이 스파이> 시리즈다. 외국에서는 사물에 대한 개념을 익히는 게임이지만 국내에서는 영어 공부까지 겸할 수 있다고 해서 인기를 끌고 있다.

에듀테인먼트 게임이 빠지기 가장 쉬운 함정이 교육적 효과만 노리다보니 정작 게임의 재미는 등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 스파이> 시리즈는 성인이 해도 재미있어서 밤을 꼴딱 새울 정도다. 즐겁게 플레이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게임세계의 민족주의에 포획되어 있었다. 노란 머리, 푸른 눈의 사람들이 외국 인테리어 잡지에 등장하는 것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 그들이 던지는 조크는 왜 우스운 건지 잘 모르겠고, 반대로 무서운 이야기는 머리카락을 쭈삣 서게 만들기는 하지만 내 존재의 깊은 곳을 뒤흔들지는 못한다. 하지만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영어를 배운다면?

언젠가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꼬마가 누군가와 부딪히자 ‘웁스’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같이 있던 부모들은 주위를 둘러보며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신문에 끼워져 날아드는 전단의 절반이 미취학 어린이 대상의 영어학원 홍보물이다. 저렴한 곳은 45만원, 비싼 곳은 100만원이 넘어간다는 영어학원에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는 애들을 보내는 부모들이라면, 미국 정서에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 것에 오히려 쌍수를 들어 환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쩐지 입맛이 쓰다. 민족주의자라고, 애국심이 강하다고 여겨지는 건 죽기보다 싫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