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ulture > 초이스 > 도서
<와이키키 브라더스> O.S.T
2002-02-07

3류여, 끈질긴 진부함이여

오늘은 <와이키키 브라더스>에 관해 영화음악 이야기도 하겠지만 영화 자체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좀 하겠다. 영화 자체가 음악에 관련되어 있으므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 지면에서 가능하리라 판단해서이다.

이름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직도 ‘밤무대 예술인 연합회’ 비슷한 단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후배 중에, 몇해 전 그 단체의 회장을 하던 분이 세상을 뜨는 바람에 그분이 쓰던 기타를 물려받은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보여준 그 기타는 고색창연한, 그러나 엄청난 아우라를 지닌 금색 팬더 스트라토 캐스터였다. 어느 인터넷 클럽에 가입하면, ‘00호텔 무빙팀 싱어 구함 숙식 제공 29세 이하’ 등등의 제목이 붙은 메일을 하루에도 몇건씩 받을 수 있다. 재즈 드러머를 지향하는 후배 하나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수원 어딘가 나이트클럽에서 밤무대 예술인 노릇을 얼마간 한 일이 있는데, 돈을 꽤 벌긴 했지만 빤짝이를 입어 피부병이 생겼다고 했다….

내가 아는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한 것은, 나이트클럽 뮤지션들이 여전히 하나의 ‘세력’으로, 삶의 한 ‘스타일’로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이 영화에서 그려진 것처럼 카바레 가수는 분명 주목받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실패한 예술인’의 부류에 든다. 이 시각은 한편으로 정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확하다. 그들은 그러면서도, 그 진부하게 양식화된 사운드와 레퍼토리를 수단으로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의 미덕은 여러 지면에서 소개된 바 있는데, 대체적으로 그 내용들을 요약하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쳐다보았다는 데 의견이 집약되는 것 같다. 그런데 내 생각으로는 ‘실패한 예술가’라는 상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았나 싶다. 이 영화의 구도처럼, 예술가가 이 시장판의 세상에서 예술가로 존재하길 고집할 때 변방의 룸펜으로 전락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진정한 예술가이기를 그치면서도 계속 ‘예술’을 하는 길도 있다. 그것이 3류로 살아가는 길이다. 여기서 3류는 저질이라는 뜻이 아니다. 삶의 밑바닥에서부터 지지를 받는, 끈질긴 진부함을 힘으로 하여 형식화된 어떤 문화적 스타일을 말한다. 그것은 생활에 직결되므로 거기서부터 생활을 길어낼 수도 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간다. 꼭 3류라고는 할 수 없어도 광고음악에서 심지어 영화음악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양의 음악이 그런 일종의 ‘포기’로부터 자신을 정립시킨다.

바로 그 대목, 즉 3류가 하나의 형식으로 솟아오르는 그 대목에 존재하는 페이소스들을 더 치열하게 물고늘어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삶에 대한 순정을 담은, 진솔한 시각의,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이 나를 감동시킴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예술가-그에 적대적인 생활 세계’의 이분법적 구도가 음악가들이, 아니 수많은 ‘생활음악인’이 살아가는 이야기의 일부만을 부각시키지 않았나 싶다. 그 점이 조금은 아쉽다.

그건 그렇고, 이 영화는 나로서도 추억에 잠길 수밖에 없는 대목이 여러 군데 있다. 특히 어렸을 때 합주실을 빌려 연습을 하는 밴드 지망생들의 이야기는 리얼하게 잘 묘사된 것 같다. 거기 쓰이는 레퍼토리들도 나의 귀를 추억에 젖게 한다. 특히 <내게도 사랑이>는 반가웠다. 한국 로큰롤사에서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이른바 ‘혼혈 밴드’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음악성을 발휘한 팀이 이 팀이다. 70년대의 음반을 들어보면 사이키델릭하기 이를 데 없다. 이들의 히트곡 중의 하나가 바로 그 곡. 이 노래들은 모두 복고적인 감수성에 호소하고 있다. 3류와 복고의 결합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3류는 전통적 형식의 진부함에 기대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 대목도 조금 더 집착해서 추구해 들어가볼 대목이었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