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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2 고교 졸업식 예행연습날 <애마부인>을 만나다
2002-02-08

`헛X` 붙들고 끊겨버린 필름

1982년 2월. 애마부인.

1982년 2월. 거리의 길목마다 전경들이 치안유지에 힘써 도둑들이 사라지고, 정치는 안정되고, 불순한 빨갱이들은 사회에 격리되고, 깡패들은 모두 삼청교육대에서 교육을 받으며 새로운 삶을 위한 참회의 눈물을 흘리니, 흉흉하던 민심이 어느덧 안정되어, 나라님께서는 이제 우리 국민들도 즐겁게 여가를 보낼 수준에 도달했다고 판단하시어, 유교적 전통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우리 국민들에게 즐거운 오락거리를 선사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그 이름도 아름다운 애마부인이었다. 세심하면서도 특별하게 신경을 쓰신 부분이 40여년 전에 민족의 건강한 모습을 표출코자 노력했던 독일영화와 미술의 예를 보시어 우리 민족도 접시 같은 유방의 콤플렉스를 과감히 던지도록 미사일을 닮은 유방의 주인공을 선보이게 하여 아시아의 맹주를 향한 발걸음에 자신감을 심어주셨으니 오호라 태평! 태평! 성대라.

나라님의 보살핌 속에 우리는 대학입시라는 한 차례 홍역을 치르고, 졸업식을 위해 졸업 예행연습이란 것을 하기 위해 학교로 모여들었다. 이미 대학 합격자가 발표되었고, 교실에 모인 어린 것들은 재수생과 대학생 그리고 사회인들로 나뉘어 서로 어색한 웃음을 날리며 ‘내일이면 이 학교도 끝이다’라는 후련함과 앞으로 시작될 험난한 인생역경들- 군대, 재수생활, 사회생활, 대학생활 따위들- 이 창해처럼 열려 있는 현실 앞에서 내일이 졸업인데 왜 머릴 잘라야 되냐고, 웅성거리며 눈매 무서운 리틀 전 선생에게 안 걸리고 어떻게 하면 그동안 고이고이 기른 머리를 안 짤릴까 전전긍긍했다.

졸업식 예행연습을 하러 강당으로 모여 내일 졸업식에서 고별사니 답사니를 외우는 행사연습과는 상관없던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숙덕거리던 중 지금 서울극장에서 상영되는 애마부인을 이야기했고,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허벅지가 드러나는 치마를 입으면 죄가 되고, 지금도 거리에서는 장발이 단속되는 그 질서 정연한 시대에, 역사시대 이후로 처음 유방이 노출된다는, 그것도 국그릇 만하다니 하는 충격적인 유언비어에 선동되어, 대학에 떨어진 낙오자 대열에서는 가슴이 실제 몇 인치인가를 놓고 승강이를 벌이다가, ‘그래 가는 거야!’ 한마디에 예행연습이 끝나면 전부 종로로 진출하여 애마부인을 보기로 단합을 했다. 졸업식 예행연습이야 어차피 공부 잘해서 상타는 애들하고, 꼰대들의 잔치니, 개근상이나 탈까 말까한 우린 알 바 없고, 예행연습인데도 눈물을 찔찔 짜는 애들은 이 풍진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되고, 졸업식 예행연습이 끝나기 무섭게 우리는 종로로 향했다.

‘씨팔, 이제 우린 그 꼬질꼬질한 고등학생이 아니고, 어른이다’ 하며 버스가 청량리 오팔팔을 지날 때. 떡 본 김에 제사까지 지낸다고, 영화 보고, 술 한잔 하고, 다시 여기로 와서 총각딱지 떼기로 웅성웅성 모의하고, 우리는 드디어 종로의 서울극장 앞에 섰다. 미성년자 관람불가 간판 앞에서 우린 고등학생 티를 안 내려고, 영화를 보고 나오는 아저씨들에게 ‘영화 볼 만합니까?’ 하고 어른 흉내를 내는 노력 끝에, 우리는 전원 무사통과로 극장 안에 들어섰고, 안소영의 가슴이 우릴 뻥 가게 만들거라는 거창한 기대 속에서 숨을 죽이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당시에는 생소하던 에로틱이란 말의 의미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별것 아니구나를 느끼며, 하명중이 자기 집 아래층에 살고 있는 안소영의 집으로 로프를 타고 강간을 하러 갈 때쯤엔, 이거 뭐 웃어야 하나? 헛X이 꼴린 우리는 극장 밖으로 나와 종로 네거리의 화신백화점 뒷골목 막걸리 집으로 향했다.

너희들 수준으로는 아직 이 정도밖에는 못 보여줘 하는 듯한, 우리를 고막이 터지거나, 엉덩이에서 피가 나올 때까지 때리고, 호탕한 척, 이조 시대 사대부들 생각의 허용 범위 안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는 음담패설을 슬쩍 이야기해주던 어떤 선생처럼 애마부인의 거대한 유방은 우리가 아직 젖비린내 나는 19살일 뿐이며, 앞으로 우리 앞에는 젊음의 숨통을 억누르는 거대한 장치들이 산재해 있다는 것을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꼴린 헛X 때문에 더욱 절실히 느꼈고, 우린 컴컴한 백열전구 밑에서 소주를 나발 불고 필름이 끊기고 골목에 오바이트를 하고, 결국 총각딱지를 그대로 이마에 붙이고, 다음날 졸업식에 그래도 가기 위해서 휘청휘청 집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오승욱/ 영화감독, <킬리만자로> 연출▶ 불능의 시대 밤의 여왕 <애마부인> 20년, 그 환각과 도피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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