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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자와 정신과 의사가 <나쁜 남자>를 논하다 (1)
2002-02-14

“신파적이고 상투적인데, 결국 그걸 넘어선다”

<나쁜 남자>가 개봉한 뒤로 <씨네21>은 두 차례에 걸쳐서 네 평론가의 김기덕론을 실었다. 여기, 영화계 밖의 전문가 두 사람에게 <나쁜 남자> 관람평을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영화평론가들의 비평만으로는 잘 짚어지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는 판단에서다. 평단을 이만큼 격렬하게 갈라놓은 건 김기덕 영화의 형식적 자질에 대한 판단는 아니며, 오히려 그의 작품들이 드러내는 어떤 징후들과 정신성이다. 그리고 이건 좀더 넓고 복합적인 시선을 필요로 한다. 정과리 선생은 예민한 독해력과 수려한 문장으로 널리 알려진 중견 문학평론가이며, 백상빈 선생은 영화에 대한 깊은 관심을 지닌 정신과 전문의로서 김기덕 감독의 <섬>에 관한 비평을 쓴 적도 있다. 영화계 밖에서 문학과 정신적 병리를 놓고 오랫동안 고민해온 두 사람의 예리한 지적은 ‘김기덕적인 것’에 얽매여 있던 평단에 신선한 충격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편집자

씨네21 영화를 보시라고 저희가 급하게 독촉을 했는데, 먼저 <나쁜 남자>의 인상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정과리(이하 정) 저는 아주 재미있게 봤습니다. 어제 <나쁜 남자>를 보고 나서 <씨네21>에서 보내준 평론가들의 글을 봤는데, 제 생각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나쁜 남자> 논쟁에 의아한 점이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러냐 하면 첫째로, 텍스트를 꼼꼼히 읽기보다는 자꾸 이론을 동원하고 있다는 점, 둘째로, 김기덕 감독의 ‘특성’을 부각시키는 데 너무 골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김기덕 감독을 잘 모릅니다. 심지어 <대괴수 용가리>를 만든 옛날 그 김기덕 감독인 줄 알았습니다. (웃음) 그런데 이 젊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대해서는 ‘독특하다’라는 게 사람들이 보는 공통적인 시각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점, 바로 김기덕 감독의 특성을 부각시키는 데 몰두하다보니 영화 전체를 살피는 데 소홀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기덕 감독 영화라고는 <나쁜 남자>밖엔 본 게 없으니 저는 아마추어 관객일 수밖에 없지만, 이 영화에만 집중하면 재미있는 요소들을 굉장히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한 여자가 어떤 남자 때문에 창녀가 됐다가 처음 자리로 돌아간 뒤 다시 뜻밖의 장면으로 끝맺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벤치에서 시작해서 벤치에서 일단락됐다가 또 바닷가 장면으로 이어져 끝난단 말이지요.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벤치에서 벤치까지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영화 보고 나올 때 같이 엘리베이터를 탄 관객도 그런 반응을 보이더라고요. 그렇게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일면 실패한 면도 있겠지요. 하지만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나쁜 남자>는 영화 전체를 봐야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를 했는지는 좀 있다 얘기하기로 하지요.

벤치에서 벤치까지: 한기의 거대한 환상

씨네21 백 선생님은 심영섭씨가 <섬>을 비판적으로 썼을 때, <섬> 옹호론을 쓰신, 정신과 의사로선 특이한 경력이 있는데, <나쁜 남자>는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백상빈(이하 백) 저는 <나쁜 남자>를 <섬>처럼 재밌게 보지는 않았습니다. <섬>은 이미지를 구성하는 능력이 대단히 뛰어난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상징도 아주 적절히 사용됐고요. 그때는 그런 점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섰던 거지요. 그런데 그런 김기덕 감독 영화의 매력이 <나쁜 남자>에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파란 대문>의 바닷가 장면을 옮겨다 맞춘 듯한 장면들도 작위적으로 느껴졌고요. 무엇보다, 맨 마지막 바닷가 장면은 신파라고 생각합니다. 여자가 몸을 팔고, 트럭이 길을 떠나는데 찬송가가 나온다, 이건 대단한 신파입니다.

정 제 생각과 다르시군요. 저는, <나쁜 남자>를 현실과 환상이 얽혀져 있으면서 또 갈라져 있는 중층구조의 이야기라고 봅니다. 바닷가에서 선화와 한기가 만나서 사진을 맞춰보는 부분을 보세요. 현실과 환상이 딱 갈라지는 대목입니다. 저는 바닷가 이전 부분은 현실이 아니라 꿈이고 판타지라고 봅니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나쁜 남자>는 창녀를 마누라로 둔 남자, 즉 ‘들병이 서방의 꿈’이라고 봅니다. 창녀 마누라한테 얹혀 살고 있는 남자가 자기 위안을 위해 자신들의 과거를 허구적으로 상상하는 내용이라는 거지요. 굉장히 모호하게 처리돼 있긴 하지만, 만약 그렇게 보지 않고 이 영화를 단일한 보통의 이야기로 보면 개연성의 문제에 부닥칩니다. 너무나 개연성 없이 전개되는 부분이 많아요. 대신 상투적인 것 투성이입니다. 저는 이 개연성 없음과 극단적인 상투성이 오히려 아주 재미있게 느껴졌습니다. 감독이 이 모든 걸 의도했는지와는 관계없이 그런 부정적 요소들을 오히려 성찰하게 하는 자질이 이 영화엔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의 앞부분을 보고 너무 상투적이고 개연성이 없어서 짜증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그냥 상투적인 건 아니구나, 하는 걸 영화를 다 보고나서 알게 됐습니다. 말하자면, 여기서 상투적이라는 건, 창의적 표현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기존의 한국영화나 드라마에 있는 상투적인 것과 이념들을 의도적으로 모델링한 결과라는 거지요. 처음에 선화가 벤치에서 남자친구를 만나는데 한기가 바라보는 장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선화의 남자친구는 선화를 옷가게에 데리고 가서 옷을 입혀봅니다. 간혹 그럴 수는 있겠죠. 하지만 대학생 연인의 일반적인 모습이 그럴까요? 이건 가난하고 예쁜 여인과 부잣집 남자의 만남이라는 상투적 표현입니다. 소매치기 장면도 마찬가지예요. 소매치기가 지갑을 놓고 갔다고 해서 대학생이 그 지갑의 돈을 훔치고, 감시하는 직원들이 그렇게 많은 서점에서 화집 한 페이지를 쭉 찢어간다는 게 리얼리티가 있습니까. 현실에선 있기 어려운 일이에요. 그것도 상투형입니다.

선화가 한기를 좋아하게 되는 것도 교묘하긴 하지만 상투성을 갖다 쓴 거예요. 선화가 한기를 좋아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기가 선화의 손을 잡고 잠든 장면 이후부터 선화의 마음이 바뀐 걸로 나오죠. 한기가 찔린 뒤에는 확실히 바뀌죠. 상식적으로 보면 자기를 파멸에 빠뜨린 남자가 칼에 찔렸을 때 공포는 느낄지언정 연민을 느끼지는 않아요. 한마디로 선화가 한기에게 매혹되는 과정에서 현실적인 설득력이 전혀 없습니다. 모두 상투적이지요. 백 선생님 말씀대로 신파이기도 하고요. 대부분의 한국드라마가 실상 설득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분위기로 내러티브를 끌고 가지 않습니까. 그런 면에서 <나쁜 남자>는 기존의 한국드라마의 일종의 모델링이라고 할 수 있어요. 리얼리티가 부족한 대목은 사실 셀 수 없을 만큼 많지 않습니까. 또 한기가 찔려서 죽는데, 문득 깨어나니 병원에도 안 가고 바로 살아 있다는 것도 그래요. 영화에서는 그냥 한기가 길거리에서 옷을 사고 하는 이런 걸로 슬쩍 넘어가는데, 그것도 자연스러운 연결은 아닙니다. 자연스럽지 않은 그런 연결들, 그게 그 이전 이야기는 환상이었다는 것을 작품 자체가 발언하고 있는 지점이지요.

요컨대, 이 영화에서 벤치에서 벤치까지의 이야기는 한국드라마의 기본적인 상투형을 갖다 쓰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고난의 이데올로기입니다. 여성에게 그것은 성적 착취로 나타나고, 남성에게는 밑바닥 인생으로 나타나죠. 저는 이 영화가 이 두 가지를 갖다붙인 거라고 봤습니다. 그 두 가지 요소가 들병이 서방의 환상을 구성하는 요소지요. 트럭에 마누라 태우고 바닷가 돌아다니면서 돈벌이하는 한기가 자기 마누라가 일하고 있을 때, ‘그렇게 깡패로 살면 멋지지 않을까’ 하고 공상하는 게 벤치에서 벤치까지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리고 환상 속의 상투형과 비개연성은 그것 자체가 결국 전체 내러티브 안에서 환상으로 담아냄으로써, 성찰케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게 <나쁜 남자>에 대해 제가 갖고 있는 해석입니다.

‘나쁜’남자의 순정, 본능적 반응을 낳다

백 전 좀 다른 각도에서 말하고 싶어요. 김기덕 감독은 대단히 순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평론가들이 비판하는 것도 그런 점에서 일리가 있지요.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폭력성, 가학과 피학 이런 걸로 비난을 주로 받는데요. 인간의 뇌 속에는 원시적인 뇌가 안에 있습니다. 그 원시적인 뇌는 동물의 뇌와 다를 바 없죠. 하지만 그 겉에 있는 대뇌 피질이 인간은 매우 큽니다. 정신과학에서는 대뇌피질이 문명과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예술만큼은 대뇌피질이 아니라 그 안의 원시적인 뇌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문명은 오히려 본능을 억압하고요. 김기덕 감독의 경우 특이한 것은, 보통 예술가들은 그 원시적인 뇌 속의 본능적인 것을 잘 포장해서 드러내는데, 그의 예술작품은 원시적인 뇌 안에 담겨진 본능들이 거의 걸러지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너무나 잘 흘러나올뿐더러 각색이나 윤색없이 그대로 나옵니다. 그런 면에서 김기덕 감독은 굉장히 순진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근데 그게 수용자들에게는 굉장히 강한 호소력을 갖죠. 관객이 머리로 반응하는 게 아니고 본능으로 반응하게 되니까요. 그의 영화에 대한 반응이 다분히 감정적인 것도 다 그런 연유입니다. 본능을 자극하는 측면이 있어요.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서는 남성의 사악한 판타지가 그대로 그려지고 있다는 여성평론가들의 비판도 그래서 있는 거지요. 이 점에 대해서 저는, 약간 다른 생각입니다. 실제로 그런 판타지가 존재하는가. 이 점이 중요합니다. 실제로 그러한 판타지가 남성들에게 존재한다면, 그것을 그려내는 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실제로 그것이 존재한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게 되지요. 여권이 신장되면서 요즘 사회는 어떻게 보면 남성의 본능이 길들여지는 사회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남성들 안의 위축됐던 원시적인 뇌가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통해서 자극되는 면이 있다는 겁니다.

정 그럴까요? ‘원시적 폭력성’이라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저는 김기덕 감독이 다른 감독에 비해 크게 일탈하는 거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실제로 한국의 문화의식을 끌고 왔던 어떤 이데올로기를 극단화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요. 이 영화를 보고 뭉클하다면, 그건 나쁜 남자가 나빠서가 아니라 순정이 있어서거든요. 우리 문화의식의 밑바닥에 그런 요소가 있습니다. 기어코 처절한 비극의 극단까지 가서 순정을 확인시키는 서사가 한국문화에서는 근대가 시작됐을 때부터 있어왔습니다. 너무도 고단한 시대를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거지요. 많은 한국영화는 신파입니다. 인물을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내몰고 나서 어떤 극단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훼손되지 않는 순수한 어떤 인간상, 끝끝내 남아 있는 것을 강조하지요. <나쁜 남자>는 그러한, 지금까지 한국 문화의식을 끌고 왔던 어떤 요소들을 종합하거나 극단화한 작품입니다. 그 부분에서 백 선생님하고 제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저는 <나쁜 남자>가, 한국의 은근슬쩍 미화되어 있는 신파를 극단화함으로써 오히려 반성하게 하는 영화라고 봐요. 반성을 가능케 하는 장치가 아까 말씀드린 현실과 환상의 이중구조라는 겁니다. 현실과 환상의 구분이 작가의 의도인가 아닌가 하는 물음은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그렇게 읽는 게 훨씬 유의미하다는 거지요. 그렇게 보지 않으면 이 영화는 상당부분 미숙하고 실패한 영화가 되고 맙니다.▶ 국문학자와 정신과 의사가 <나쁜 남자>를 논하다 (1)

▶ 국문학자와 정신과 의사가 <나쁜 남자>를 논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