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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를 시작하는 스무살들에게
2002-02-20

신경숙의 이창

내가 스무살 때 태어난 조카의 이름은 순정이다. 우리 나이로 내가 마흔이 되니 그애가 스물이 되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프로야구 원년이거나 아니면 그 다음해의 여름에 그애가 태어났을 것이다. 올케가 해산하러 시골에 가고 오빠가 퇴근하기를 기다리며 나는 저물녘에 빈집에서 프로야구를 보곤 했다. 특히 해태가 게임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운동경기에는 별 흥미를 못 느끼는 내가 아직도 김성한, 이상윤, 김봉한, 그 뭐였더라… 이름이 가물가물한 김 뭐라고 하는 도루왕을 응원하며 한여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시골에서 전화가 왔다. 여자애가 태어났다고 했다. 우리 집엔 참으로 오랜만에 생긴 아기였다. 모두들 황홀해했다. 그애만 보면 서로 안으려고 했다. 나중에 아기는 손을 너무 타서 안아줘야만 잠을 잤다. 잠이 든 것 같아 내려놓으면 귀신같이 알고 울었다. 그때는 희귀병인 디스크를 앓으며 고시공부를 하던 나의 셋째오빠는 뒤엉킨 젊은 날의 시름을 그애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달래는 때가 종종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여서 그애가 태어나고 나서는 집에 마치 무슨 향기나는 꽃나무가 자라고 있는 듯이 거리에 있다가도 그애를 보러 집으로 향하곤 했다. 사람에게서 그렇게 좋은 냄새가 난다는 것, 사람이 그렇게 부드럽다는 것, 사람이 그렇게 쓰다듬고 안고 싶은 것이라는 것을 그애를 통해 배웠다.

그애가 스물이 되었다.

지난 일년 동안 그애는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걸핏하면 무슨 핑계를 삼아 모이는 걸 좋아하는 우리 가족은 지난 일년 동안 우리에게 큰형네이거나 큰오빠네인 그애네 집을 슬슬 피하며 그애가 가능하면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애는 어렸을 적부터 의사가 되겠다고 말했다. 내신성적이 좋았고 공부를 무척 잘했고 지난 일년 동안 빈틈없이 입시에 임했기 때문에 나는 그애가 당연히 이번 입시를 통과할 줄 알았다. 마음속으로 제발 큰오빠가 어떤어떤 대학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만 품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어느 대학이냐는 아무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과가 중요하다, 발언을 은근히 여러 번 했다. 일년이 지났다. 그애는 수능시험을 치르고 와서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웠다. 수시를 치르는 족족 미끄러졌다. 정시를 기다리는 사이에 당사자가 실망하고 지쳤다고 했다. 나는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전화조차 하지 못했다. 시골에 가서 설을 지내고 온 셋째오빠가 우리 집에 들러 그애 소식을 전했다. 모 대학에 합격을 했으나 제2지망이라 그애가 가려는 곳이 아니었다. 재수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내가 전화조차 못한 사이 전쟁을 치른 모양이었다. 얘기를 듣는 동안 나는 도대체 어떤 애들이 그애가 가고 싶은 과에 가는지 궁금해졌다. 그동안 입시문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아도 절실하게 와닿지가 않더니 그애가 입시를 얼마나 철저히 준비해왔는지를 지켜본 나로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애가 자신이 가고 싶은 과에 들어가지 못한 건 납득이 되질 않았다. 새벽 두시에 학원에 가기도 하질 않았던가. 대체 어떻게 더 해야 한단 말인지. 저물녘 내내 서성대다가 밤이 되어 자동차를 몰고 그애네 집에 가서 그애를 납치하다시피 내 집에 데리고 왔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얼굴에 뾰루지가 수도 없이 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검은 머리 밑의 흰 이마가 반듯했다. 결혼할 때 어머니가 해주신 이부자리를 펴고 베개를 나란히 놓고 그애랑 누웠다. 이제 재수를 시작하려는 그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태산같았다. 그런데 말이 안 나왔다. 미적거리다가 누군가가 나에게 선물한 다섯 가지 향수가 든 상자를 꺼내와 그애에게 주었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애가 먼저 그런다. 고모 나, 재수하는 거 힘 안 들어요, 나보다 엄마가 문제죠. 내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갑자기 나는 내가 그애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가 의아해졌다. 무슨 말을 하려 했나. 일년 그거 아무것도 아니란다, 이것이었나? 일년 더 공부해서 네가 하고 싶은 일 하게 되면 지금 힘든 거 다 잊게 된단다, 안 그러면 평생 뒤만 돌아보며 살게 돼, 이런 것이었나? 갑자기 자동차를 몰고 가 그애를 데려올 때는 하고 싶은 말이 들끓었는데 내 입에서는 불쑥 순정아, 내년 이맘때 고모랑 여행갈래?였다. 그애가 어디로요?라고 물어줘서 고마웠다. 글쎄, 어디로 갈까? 너, 어디 가고 싶은데? 파리? 프라하? 페루? 차라리 그애가 툴툴거리고 성질을 부렸다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할 수 있었을 텐데. 새벽에 일어나 물끄러미 모로 누워 잠이 든 그애를 바라보다가 나와 글을 쓴다. 재수를 시작하는 모든 스무살들이여! 건강과 축복이 함께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