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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일감독의 나홀로 영화 만들기
2002-03-02

`나는 다른 영화를 꿈꾼다, 만든다`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는 모든 점에서 예외적으로 뛰어난 작품이다. 전수일 감독의 첫 장편인 이 미니멀리즘 작품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말로 들려준다기보다 암시해준다. 창백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이 영화는 홍상수의 현대적이고 군더더기 없는 영화 계열에 속한다.” _(<르몽드> 2001년 6월16일자)“이번 한국영화제에서 발굴된 보석은 전수일 감독의 장편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이다. 전수일은 대사가 거의 없는 롱숏을 많이 쓴다. 따라서 주인공 김은 뭔가 결여된 듯 낯설어 보이고 여인과 함께 든 침대에서조차 고독해 보인다.” _(<카이에 뒤 시네마> 2001년 6월호)“은밀하게 전율하는 전수일의 작품 세계는 걸음을 멈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_(<르몽드> 2001년 6월, 문화예술부록) 3월1일 서울의 단 한개 극장에서 개봉하는 영화가 있다. 제작된 지 3년 만에 어렵게 관객을 만나게 된 이 영화는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된 이후 거의 잊혀지다시피 했던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 부산 경성대에서 영화 실기를 가르치는 전수일 감독이 혼자 힘으로 만든 영화다. 94년부터 부산에서 독립적인 제작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온 그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고집스럽게 걸어가고 있는 감독이다. 모든 영화가 서울에 집중돼 있을 때 “이런 사람도 있어?”라는 냉소를 견디며 부산에서 영화를 만들었고, 상품이 아닌 영화도 관객을 만날 기회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전수일 감독. 그의 험난하면서도 행복한 영화 만들기가 여기 있다. 편집자주인터뷰가 끝나고 막 일어서려는데 전수일 감독이 급한 손길로 서류 파일 하나를 건넸다. 그 속에는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 제작발표회 사진과 촬영 현장에서 찍은 스틸 사진, 지난해 파리에서 한국영화제가 열렸을 때 <르몽드> <카이에 뒤 시네마>에 실린 <새는 폐곡선…> 관련 기사, 그 기사들을 직접 번역한 문서 몇장이 어색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베니스영화제 ‘새로운 영역’ 부문을 비롯해 영화제 출품 경력은 화려하기 그지없지만, 한국에선 3년을 기다린 뒤에야 간신히 극장 하나를 잡을 수 있었던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

그는 사람들이 잊어버리고만, 어쩌면 처음부터 기억할 마음조차 품지 않았던 자신의 영화가 스스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나는 이렇게 시간을 견뎌왔다고 확인받으려 했던 것일까. 그러나 “창백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영화”라거나 “정지와 운동을 하나씩 포착하는 전수일의 섬세함은 앞으로 수작들을 예고한다”는 찬사는 이해하지 못할 낯선 언어로 적혀 있어 외로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먼 부산에서, 혼자, 고집스럽게 영화를 만들고 있는 전수일 감독 자신처럼. 영화 두편, 빚은 2억5천

전수일 감독의 나이는 올해로 마흔넷. 중견 감독으로 불릴 수 있을 정도로 나이를 먹은 그는 지금까지 단 두편의 영화를, 그것도 본 사람이 거의 없는 영화를 만들었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네편의 영화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첫 영화 <내 안에 부는 바람>은 10분짜리 단편영화 하나와 그 단편이 실마리가 된 중편영화 두편이 모여 완성된 영화이기 때문이다. 각기 아이와 청년, 노인에게 다가오는 시간의 의미를 사색하는 <내 안에 우는 바람> 중 조재현이 출연하는 2부는 그해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되기도 했고 서울과 부산에서 잠깐 개봉도 했다. 열흘 동안 부산 시민회관에서 이 영화를 본 관객은 3500명 정도. 대담하게도 독립영화를 35mm로 찍은 그는 관객과 만나는 데 실패한 이 영화 때문에 상당한 액수의 은행 빚을 지게 됐다. “<내 안에 우는 바람>이 칸영화제에 초청되자 삼성영상사업단이 해외 판매를 맡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돈이 될 것 같지 않자 중간에 손을 떼버렸다”고 아직도 화를 삭이지 못한 듯 말하는 그는 “그런 분노 때문에라도 계속 영화를 만들게 된다”고 했다.그러나 그는 오직 분노에 기대 투사처럼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아니다. 부산 경성대 영화학과 1기 입학생으로 모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그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쉽게 떠나보내지 못하는 사람이며 대도시의 빠른 호흡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내 안에 우는 바람>이나 <새는 폐곡선…>은 모두 말을 아끼는 전수일 감독이 직접 목소리를 내지 못한 사연을 대신 전하는 영화들이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아바이 마을이라고 불리는 강원도 속초의 청호동. 실향민들이 모여 사는 이 외로운 마을은 쇠줄을 당겨 호수를 건너도록 되어 있는 갯배로 유명한 곳이었지만 이제는 드라마 <가을동화>에서 은서와 준석이 안타깝게 서로 스쳐 지나가는 장소로 더 유명해진 곳이다. 중학교 3학년 때 서울로 이사간 전수일 감독은 20년 만에 다시 찾은 이 고향에서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청호동엔 그가 살던 집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결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어린 새들이 있는 새집을 통째로 가져와 소중히 기르고 날마다 가까운 바다에서 수영을 하던 소년은 사라졌다. 오랜 외국생활 끝에 기억 속의 자신을 더듬고 싶어져 고향을 찾은, 서른을 넘긴 어른만이 그 자리에 있었다.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제각기 다른 속도로 흘러간 것 같은 시간 앞에서 그는 <내 안에 우는 바람>의 1부 <말에게 물어 보렴>을 떠올렸다. 아침 일찍 시내로 시간을 알아보러 떠난 꼬마가 온갖 일에 한눈을 팔다 어둠이 내릴 무렵에야 돌아와 할머니에게 “지금 열시야”라고 말하는 <말에게 물어 보렴>은 그의 말에 의하면 “아주 단순하고 쉬운 영화”였다. <내안에 우는 바람>, 레오 카락스의 선물이 아이디어 줘

그 자신에겐 평범한 어조로 말을 거는 영화였을지 모르지만, 이 영화를 만드는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 못했다. 전수일 감독은 16mm 상영 공간이 부족한 부산에서 작업했기 때문에 이 영화를 35mm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즈음 부산을 찾은 <퐁네프의 연인들>의 감독 레오스 카락스가 그에게 소형 녹음기를 선물하면서 “이제 꿈을 글로 기록하려 한다”는 말을 했고, 이 말 때문에 꿈이 사라지기 전에 녹음해 뒀다가 글로 옮기는 청년의 이야기인 2부 <내 안에 우는 바람>이 나오게 됐다. 사정이 달라진 것은 아마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이왕 35mm로 시작한 일, 그는 겁도 없이 내리 두편의 중편영화를 35mm로 밀어붙였다. 이 영화가 개봉하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함께 학교를 다닌 인연으로 출연하게 된 그 당시의 조재현은 관객을 끌 수 있을 만한 스타가 아니었고,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색적인 영화의 내용 역시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할 수 없이 그는 직접 제작사 동녘필름을 차려 은행 대출을 받기로 했다. 4년에 걸쳐 <내 안에 우는 바람>을 만들면서 생긴 빚은 당연히, 아직도 갚지 못했다. 지금은 부산에서 영화 찍는 일이 마치 유행처럼 번지고 있지만 <내 안에 우는 바람>을 만들 때만 해도 부산은 그 고장에서 영화를 배운 학생들마저 채 수용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런 도시에서 무명의 배우들과 영화를 찍고 있으면 부산지역 특유의 텃세를 과시하면서 촬영을 방해하는 사람도 많았다. 차라리 신기하다며 몰려드는 사람들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고작 몇 백명이 극장에 들른 서울과 달리 부산에선 객석이 절반은 찼고 “이런 영화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새로운 맛을 느꼈다”며 고마운 말을 전하는 관객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내 안에 우는 바람>의 칸영화제 출품 비용을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모든 일이 엉켜 있던 상황 속에서도 그런 밝은 면만을 마음에 남기기로 했다. 그의 첫 장편 <새는 폐곡선…>은 그래서 가능했던 영화이다. <새는 폐곡선…>은 전수일 자신의 일상과 고민이 많이 담겨 있는 영화다. <내 안에 우는 바람>의 스탭 일부와 경성대 영화학과 학생들을 불러모아 만든 이 영화는 지방대에서 영화를 가르치는 교수 김의 이야기. 가족과 떨어져 혼자 부산에서 지내는 김의 아파트는 전수일이 사는 집에 갈색과 푸른 색조를 더한 곳이며, 지방에서 영화를 배우는 일에 대해 어려움을 토로하는 학생들은 정말 그의 학생들이다. 끊임없이 외부와 충돌하며 영화란 무엇인가를 묻는 김의 싸움 역시 전수일의 현실과 고스란히 겹쳐 있다. 그는 “<새는 폐곡선…>은 내 자신에 대한 것을 영화로 표현하고 싶어 만들었다”고 말했다. “내가 바라보는 주위 상황을 영화로 표현할 수 있을지 실험해봐야만 했다.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서는 계속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 같았다”는 것이다. 그는 영화를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 작가가 책을 쓰듯 감독은 영화를 만든다고, 시간을 들여 천천히 읽어야 하는 책이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하면서 느리게 들이마셔야 하는 영화도 있는 거라고. 그러나 <새는 폐곡선…>은 <내 안에 우는 바람>이 잡은 개봉의 기회마저 잡지 못했다. 투자를 받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부산지역 언론이 모인 가운데 제작발표회까지 했지만, 투자를 약속했던 친구는 결국 돈을 주지 못했다. 지원이 아니라 대출 형식으로 돈을 댄 부산의 어느 학원 재단이 아니었다면 그는 <새는 폐곡선…>의 후반작업을 마치지 못할 뻔했다. “사실 <박하사탕>이 아니라 <새는 폐곡선…>이 설경구가 처음 주연한 영화인데…. 이제 빚이 2억5천만원이 됐다. 월급으로는 이자를 갚는 데 바빠 원금은 갚지 못하니 빨리 늙는 것 같다”라고 쓰게 웃으며 몇 마디 덧붙이는 그에게는 뒤늦은 영화 열기로 들떠 있는 부산의 뜨거운 공기도 아주 쌀쌀하게만 느껴질 것 같았다.부산은 뭔가 ‘다른’ 영화의 고향사실 전수일 감독은 1년 동안 <가슴 달린 남자>의 조감독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막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였다. 한국 사정을 잘 몰랐던 그는 자신의 시나리오를 영화로 만들겠다는 욕심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깨닫고선 먼저 경험을 쌓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서울도 충무로도 그에겐 잘 맞지 않았다. “서울에선 모든 일이 너무 빠르게 흘러간다. 서울 사람들은 일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하는 것처럼 바빠 보인다. 지하철을 타고 다녀야 하는 것도 너무 싫고.” 그때 마침 모교인 경성대에 교수 자리가 생기자 서울에 미련을 둘 까닭이 없어졌다. 부산에서도 영화는 만들 수 있었고 무엇보다 바다를 앞에 두고 살 수 있었다. 속초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바다는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장소였다. 부산은 그것말고도 의미있는 조건 하나를 더 제공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얻는 신선한 자극이었다. 김이 따분하다면서 피하는 <새는 폐곡선…>의 학생들과 달리, 그의 학생들은 일주일에 세번은 함께 술을 마시며 전수일과 어울리곤 한다. 지금은 영화 때문에 수업을 간간이 빼먹어 “옛날보다 애정이 식었다”는 투정을 듣지만, 그는 항상 새로운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교수가 된 동기를 유감없이 충족시켜왔다. 영화란 무엇인지, 가끔은 외면하고 싶을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학생들은 그에게 배우면서 그를 가르치는 존재가 됐던 것이다. 물론 그 반대의 관계 역시 성립했다. 전수일은 자기 영화의 스탭 70%를 학생들로 충원한다. 현장 경험을 할 기회가 많지 않은 부산에서 그는 실기에 목마른 학생들 앞에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현장을 던져주는, 거의 유일한 원천이나 다름없다. 동녘필름, ‘다른 영화’의 기반

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제작 준비에 몰두하고 있는 요즘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 영화는 스스로 제작비를 충당하고 방학을 이용해 촬영을 하던 기존 제작 방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작품이다. 투자자를 끌어모아야 하고, 더이상 수업을 빼먹기가 미안해 학교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부산까지 떠날 생각은 없다. “후반작업만 해결할 수 있다면 부산은 영화를 만들 만한 조건이 충분히 갖춰져 있는 도시다. 장비와 인력은 전혀 부족하지 않다. 서울에 있으면 투자자를 만나기가 쉽겠지만, 그처럼 쉽게 들어오고 빠져나가는 자본이 영화를 기획 상품처럼 만들고 있다. 나는 다른 영화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 ‘다른 영화’의 기반이 될 중심은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제작사 동녘필름이다. 제작까지 떠맡아야 했기 때문에 만든 동녘필름은 각기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프로젝트가 있을 때마다 모이는 회사다. 이 회사는 전수일의 영화 두편 외에도 네편의 단편영화를 제작했다. 그중에는 <내 안에 우는 바람>을 시작한 94년부터 그의 조감독으로 일해온 이정애 감독의 <집>도 포함돼 있다. 오직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영상만 만들고 싶다는 사람이, 서울의 빠른 리듬이 피곤해 부산에 머무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영화를 제작하고 싶을까. 그런데 그는 동녘필름의 규모를 확장해 본격적인 프로듀서 일을 시작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다른 영화문화가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영화, 계속 만들 수 있다! <내 안에 우는 바람> 1부를 만든 뒤 벌써 8년이 지났는데 전수일의 상황은 뚜렷이 나아지지 못했다. 가족을 비롯한 주변의 걱정도 여전하고 2억5천만원에 달하는 빚도 언제 갚을지 기약할 수 없다. 그러나 영화 만드는 일이 우선이다. 그는 <나는 나를 파괴할…>이 수익을 안겨줄 영화라고 믿지 않으면서도 그 소설 속에서 자신이 너무나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발견한 일만이 기쁘다. <나는 나를 파괴할…>은 너저분한 삶을 끝장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죽음이라는 해결책을 속삭이는 남자의 이야기. “자신의 삶을 언제 끝낼지 결정한다는 설정이 매력적이지 않으냐”면서 동의를 구하는 그는 차분한 말투를 들쑤시며 올라오는 희망을 감추지 못했다. 받기 싫은 전화를 받아야 하는 것이 싫어서 삐삐만 가지고 다니는 사람. 영화를 만들기 전에는 아주 오래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3, 4년에 한편 정도밖에 영화를 만들지 못할 것 같지만, 일단 현장에 나가면 테이크는 세번만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성미 급한 사람. 그는 이런 모순들이 충돌하는 와중에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갈 사람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꼭 이루고 싶은 그의 소망 하나가 있다. 돈이 생기면 부족한 예산 때문에 참아야 했던 <내 안에 우는 바람> 사운드 보정 작업을 다시 하는 것이다. “빚은 언제?”라는 질문에 “지금부터 갚아나가면 되니까”라고 느긋하게 대답하는 그는 30년 뒤에라도 <내 안에 우는 바람>을 들고 사운드를 고치러 나갈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글 김현정·사진 이혜정<사진설명>1.전수일 감독 2,3,4,5 영화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 전수일이 만든 영화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