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독립영화계의 돌연변이 김지현 감독의 이상한 장편 만들기
2002-03-08

노는지, 영화찍는지, 잡담하는지 통 모르겠네

김지현

1968년 서울생

동국대 불교학과, 프랑스 ESEC 졸업

1995년 Digital 8mm 16분

2000년 <웃음> DV 6mm 9분

2000년 <연애에 관하여> DV 6mm 31분

2001년 <바다가 육지라면> DV 6mm 41분

2002년 <뽀삐> 촬영중 31분

<바다가 육지라면>이라는 단편영화가 있다. 과연, 어떤 내용일까.

“자, 지금부터 제가 라면 하나를 끓여 보이겠습니다. 오늘 제가 준비한 라면은 안성탕면인데요. 가격 대비 제일 양이 많은 라면이라 이걸로 택했습니다…”

그렇다. 라면에 관한 영화다. 한국사람이라면 그 요리법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라면을 소재로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저마다의 요리법과 거기 곁들여진 사연을 담은 친숙하고도 참신한 영화가 바로 지난해 인디포럼 개막작이었던 <바다가 육지라면>이다. 대여섯명의 사람들이 차례로 조리대 앞에 서서 자신만의 라면요리법을 소개하는 옴니버스 요리강좌 형식의 이 영화는 가장 친숙한 것들을 통해 새로운 것에 도달했고, 라면이라는 일상적 소재가 ‘기본 스프’ 외에 그다지 큰 양념 없이도 그 자체로 훌륭한 영화의 재료가 된다는 사실을 입증해 독립영화계 내에서도 신선한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라면 다음은 강아지

이 괴상한 단편을 만들었던 독립영화감독 김지현이 요즘 라면에 이어 애완견을 찍고 있다. 그런데, 이번엔 장편이다. 물론 누가 나오느냐 어느 제작사에서 만드느냐를 궁금해할 필요는 없다. 그냥 라면 요리법을 찍듯 주변 사람들을 불러모아 좀 길게 찍고 있을 뿐이다. 김지현은 그런 사람이다. 친숙한 소재를 찾아 친숙한 사람들과 마치 집에서 요리하듯 영화를 찍는다. 그에게 영화 만들기란 생활의 일부다. 뭐 장편이라도 아마추어의 습작이겠군, 하고 지레짐작하는 사람들이라면 <바다가 육지라면>을 꼭 보길 바란다.(요즘 아트선재 등에서 독립영화 상영회를 자주 한다). 라면 끓이기라는 단순한 행위가 반복되는데 거기엔 기묘한 리듬감과 썰렁하지만 예사롭지 않은 유머감각, 섬세한 인류학자적 관찰력까지 느껴진다.

김지현 감독의 첫장편은 뽀삐라는 이름의 요크셔테리어 강아지를 키우는 남자 김수현을 중심으로 다양한 주변 사람들의 개에 관한 이야기가 릴레이 토크다. 제목도 극중 애완견의 이름을 딴 <뽀삐>. 강아지의 죽음이라는 드라마적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영화의 인트로인 셈이고 영화의 대부분은 주인공 수현과 그 주변인물들, 그리고 개에 관한 나름대로의 이야기거리가 있는 다양한 다른 이들의 ‘이야기’ 자체로 이루어져 있다. 버스를 타고 이사간 집을 찾아왔다는 개, 피 속에 흐르는 바람 따라 베란다에서 가끔씩 찬바람을 음미한다는 시베리안 허스키, 사람들을 자신이 지배한다고 믿는 개 등 개에 관한 각종 경험담은 물론이고 동양 고전에 등장하는 개에 관한 기록까지, <뽀삐>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이야기’ 자체로 성립되는 영화다.

한국판 디지털 살롱 열어

김지현 감독은 단편 작업에서부터 이 같은 인터뷰 위주의 영화를 시도해왔다. <바다가 육지라면>이 한사람씩 ‘발표’를 하는 식이었다면, <연애에 관하여>의 말하기 방식은 둘러 앉아 ‘이야기 주고받기’였다. <연애에 관하여>에서 세 명의 여자는 어느 정원의 테이블에 모여 앉아 연애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그 이야기 속의 남자는 이들이 모두 아는 사람. 게다가 그로부터 실연을 당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한 여자가 바로 그 남자의 새 애인이라는 미묘한 상황이 삽입되는 드라마 장면으로 알려진다. 이 같은 방식은 <뽀삐>에서도 그대로 사용된다. 사람이 개 이야기를 하는 중간중간 그 개의 실제 모습이 이야기의 내용대로 비춰지는 것.

스토리와 드라마보다 인물들의 대사가 주를 이루는 김지현의 작품들은 얼핏 에릭 로메르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모여 앉아 자근자근 이야기 나누기, 웃을 듯 웃을 듯하며 안 웃고 장난스레 말 주고받기, 고모할머니의 일화에서 동양철학까지 시대와 권위를 넘나들며 참고자료 인용하기, 무엇인가를 마시거나 요리하기, 고백하기 혹은 감추기, 공감하듯 흉보기. 금테 두른 커피잔과 귀족 부인들의 부풀려진 드레스만 없을 뿐, 이런 것을 통해 김지현 감독은 종종 자신의 단편영화 안에 20세기 말/ 21세기 초에 어울리는 한국판 디지털 살롱을 열고 있다. 그것은 <웃음>(2000)에서처럼 ‘웃음의 다양한 의미’에 관한 에피소드적 담론이기도 했고, <연애에 관하여>(2000)에서처럼 아는 사람 사이에 모르게 벌어지곤 하는 연애에 대한 은밀한 보고이기도 했으며, <바다가 육지라면>(2001)에서는 이 시대의 생필품이라고 할 수 있는 라면을 급거 화제로 택하기도 했다. 그리고 장편 <뽀삐>는 이를 장편으로 확대하는 시도다.

Free & Easy, 나의 스타일

김지현 감독이 사석에서나 영화 속에서나 곧잘 채택하는 살롱식 주제들, 그것들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의 의미망에 걸리면 자못 진지한 생각거리가 된다. ‘왜 우리는 잠에 관해서 거창한 이야기를 하지 못하나. 늦잠 가지고는 얘기를 잘하면서’ 등 생경한 주제도 그의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으며(구성연과 최근 심각하게 나눴다는 이야기), 라면물을 얼만큼 넣느냐도 그녀의 영화 속에서는 자못 의미심장해진다(<바다가 육지라면>). 하물며 개에 관한 기억(<뽀삐>) 정도라면….

당연히 스타는 아니지만 <뽀삐>의 출연진은 꽤 흥미롭다. 주인공 김수현 역에 어어부 프로젝트의 백현진씨, 그의 친구 중 한명으로 김지현 감독의 영화에 최다출연한 사진작가 구성연씨가 그들이다. 구성연씨와 백현진씨는 이미 김지현 감독의 전작에서 연기력이 검증된 배우들. 백현진씨는 <바다가 육지라면>의 요리실연자 중 한명으로, 대파 조각이나 작은 배춧잎 등 재료를 주머니에서 꺼내 라면을 만들며 형이 라면을 줄창 먹어 영양실조가 됐던 일 등 가족사를 이야기했던 출연자다. 한편 구성연씨는 <뽀삐>가 네번째로 출연하는 김지현 감독 영화일 만큼 감독의 단짝배우인데, <웃음>에서는 잠깐 뒷모습이 나오는 엑스트라였고, <연애에 관하여>에서는 모여 앉아 이야기하는 세 여자 중 한명으로 주로 묻고 듣는 인터뷰어의 입장이었다. <바다가 육지라면>에서는 아마도 등장한 인물들 중 가장 인상적인 라면요리를 ‘선보이지 않고 말로만 들려준’ 사람. “인연의 사슬을 끊는 구도의 자세로 구부러진 라면발들을 모두 쪼개 방안에 늘어놓은 후 거둬 물 속에 끓인다”는, 절대 사실이 아닌 계룡산식 라면조리담을 설파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구성연씨는 김지현 감독과 동국대 선후배 사이이며, 일러스트레이터(<씨네21>에도 그린다) 겸 보컬리스트에다 연기까지 겸하고 있는 백현진씨는 <바다가 육지라면> 촬영직전에 우연찮게 김지현 감독을 만나 캐스팅됐다. <꽃섬>으로 영화에 재미를 붙였고 구경차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촬영장을 찾았다 뒷모습을 찍히기도 한 백현진씨는 흥미로운 감독의 새 영화 출연제안에 “화폐벌이도 할 겸” 단박에 OK했다.

<뽀삐>의 촬영에서 이들이 대본대로 연기를 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로 평소의 옷차림으로 평소의 말투로 평소의 표정으로 연기에 임한다. 그런데 그게 바로 김지현 감독이 원하는 연기고 <뽀삐>가 필요로 하는 연기다. 백현진씨가 말하듯, 언젠가 김지현 감독이 입은 옷에 쓰여 있었다는 글귀대로 ‘Free & Easy’가 김지현 감독의 연출 스타일. 어쩌면 그것은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아내야 하는 영화로서는 당연한 연출 스타일일지도 모른다.

<뽀삐>는 이야기꾼 김지현 감독이 그간 단편에서 흘낏흘낏 보여왔던 끼를 긴 버전으로 보여주는 작업이며, 구성연과 백현진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자연인 자신과 캐릭터를 뒤집어가는 다큐멘터리적인 연기로 그것을 뒷받침하는 훌륭한 초대손님이다. 아마도 <꽃섬>에서 조금은 튀었던 백현진의 연기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채로 완성된 영화 <뽀삐>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어우러져 있을 것이다. 구성연의 입담이야 말할 것 없고.

화장지와 개 사료가 제작비 보충

<뽀삐>는 CJ CGV 기금에서 2500만원, 영진위 기금에서 750만원을 받아 만드는 예산 3250만원짜리 저예산 장편영화에 소니 PD150 카메라로 촬영되는 디지털영화다. 출연배우들은 선금없이 수익이 나면 출연료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일하고 있으며, 카페 등 촬영지 사용료로는 ‘뽀삐’ 화장지 회사인 유한킴벌리에서 지원해준 휴지 ‘뽀삐’와 역시 협찬받은 개 사료 ‘퓨리나’가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다. 제작비의 상당 부분이 청담동 한 카페의 주인으로부터 구한 강아지 뽀삐의 출연료와 조련비에 쓰이고 있다니, ‘뽀삐프로젝트팀’의 살림이 얼마나 알뜰한지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제작비 때문은 아니지만, 각자의 ‘전공’을 살려 구성연씨가 영화 스틸을, 백현진씨가 포스터를 맡고 있기도 하다. 현재 이 작품의 촬영은 총 25회 중 17회가 진행된 상태. 8월 개봉이 목표다.

친구들과 재미난 이야깃거리를 잡아 지적인 유머를 나누기. 이야기 함께하기 좋은 이들을 불러모아 친구 되기. 68년생 감독 김지현의 소박하지만 화려한 장편 데뷔는 이렇게 재미나게 진행되고 있다. 뜻맞는 사람들과 즐겁게 단편작업을 해오던 김지현 감독과 그녀의 친구들은, 지금 그들로서는 유례없이 큰 판돈을 가지고 좀더 긴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사 다른 누구를 의식하는 것일랑은 하나 없다. 괜히 거창한 스토리를 갖고 나온 것도 아니다. 조금 더 길게,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자세히 그동안 못다한 이야기를 하려할 뿐. 처음처럼 원래대로 그들의 영화만들기는 태연자약하다. 오히려 더 느긋할지도 모른다. 김지현의 영화 자체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글 최수임 sooeem@hani.co.kr·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 화계의 돌연변이 김지현 감독의 이상한 장편 만들기

▶ 김지현 감독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