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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 중견 프로듀서들의 히든 프로젝트 [5] - 유인택
김현정 2002-03-08

기획시대 대표 유인택의 <계백>

무릎 꿇은 패전국 장수의 꿈

구상하게 된 계기는? 우리는 왜 역사적인 사실을 영화로 만들지 못하는지가 항상 궁금했다. 그건 한국 현대사가 왜곡돼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영화계를 주도하는 지식인들은 70, 80년대를 군사정치와 독재에 부대끼며 지내왔다. 역사를 건드릴 때 민감할 수밖에 없다. 진실에 다가서면서도 미묘한 긴장을 의식하게 되고, 하나의 사실을 두고도 서로 다른 관점이 첨예하게 부딪친다. 한마디로 말이 너무 많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사관이나 이념에 짓눌리지 않고 정말 재미있는 역사물을 만들 수 있는 시기가 된 것 같았다. 그때 떠오른 인물이 계백이었다. 계백은 그 자취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인물이다. 자기 손으로 가족을 죽이고 전쟁터에 나선 그는 비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종말을 맞았지만, 그가 어떻게 거기까지 가게 됐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역사 속에서 사라진 패전국의 장수 계백. 그의 생애를 자유로운 픽션으로 구성해 보자고 생각했다. 그동안 경험을 많이 쌓은 것도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마음을 먹는 데 도움을 줬다. <이재수의 난>을 찍을 때는 열개 넘는 전봇대를 뽑았는데, 이젠 컴퓨터그래픽으로 전봇대를 지울 수 있다. 제작비도 많이 올랐고, <무사> <비천무> 등을 통해 중국 촬영의 노하우도 생겼다. 광활한 중국의 들판에서 황산벌 전투를 재현하고 싶다.

대중적 호소력 여부는? 요즘 사람들은 너무 힘이 없다. 의리나 신념, 목숨 바쳐서 지키고자 하는 무엇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에 비하면 계백은 얼마나 멋있는가. 아마도 관객은 계백을 통해 자신들이 잃어버린 꿈을 대신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계백>은 철저하게 상업적인 영화가 될 것이다. <이재수의 난>을 그처럼 재미있는 영화로 만들려다 실패했지만, 이번만큼은 철저하게 준비해 성공하고 싶다.

현실화 계획은? 아직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네번 정도의 수정을 거쳐 스토리만 나와 있고 시나리오 작가를 알아보는 중이다. <이재수의 난>은 감독이 사전제작 과정에 개입해 처음 컨셉과 어긋난 면이 있다. 그런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계백>은 완벽한 시나리오가 나온 뒤 감독 섭외에 들어가려고 한다. 배우도 시나리오가 완성돼야 캐스팅할 수 있을 거고. 그때까지는 기획시대 자체 자본이 투입될 것이다.

개인적 의미와 산업적 의의는? 한국영화는 제한된 시대에서 소재를 취하기 때문에 서로 비슷해지고 있다. 가끔 역사물이 나오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인물이 아니라 순전한 픽션에 기초하는 영화들이었다. 중국 사극은 친숙한 인물의 이야기를 각색하기 때문에 재미를 느끼기가 쉬운데. 만일 <계백>이 성공한다면 한국영화는 역사라는, 무궁무진한 소재의 보고를 발굴하는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나 자신에게도 <계백>은 무척 중요한 영화다. <이재수의 난>의 한풀이니까.

성패의 관건은?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액션을 얼마나 폼나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그 다음은 관객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다. 번성했던 백제가 왜 그토록 짧은 시간 안에 멸망하게 됐는지를 계백과 의자왕의 암투로 설명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 물론 멜로도 빠질 수 없다.

<계백>은 어떤 영화?

백제의 운명을 건 전투가 벌어지기 얼마 전, 아내와 두 아이와 함께 한적한 바닷가에서 살던 한 사내는 자신을 찾아 바다를 건너온 돛배를 만난다. 사내의 이름은 계백. 운명의 끝을 예감한 그의 아득한 시선과 함께 영화는 9년 전, 젊은 왕과 그보다 더 젊은 장수가 마음을 모았던 꿈같던 시절로 돌아간다.

신라군에 부모와 세살배기 여동생을 잃은 계백은 누구도 돌보지 않는 변방 백성들과 함께 토성을 재건한다. 의자왕은 이 젊은 성주가 중앙 관리들과 달리 거친 야성의 기운을 가졌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심복으로 삼는다. 한때 백제는 이 젊은이들과 함께 번영을 회복하는 듯싶었지만, 신라의 계략과 의자왕 자신의 오만 때문에 나라는 휘청거리기 시작한다. 계백은 험난한 여정 끝에 맺어진 연인 시진과 함께 자신을 배반한 모든 이들을 등지고자 하나 결국 황산벌에 서고 만다.

<계백>은 계백의 일생 중 스스로 가족의 목숨을 끊었다는 고사와 관창의 목을 벤 일화만을 가져온 영화다. 시대와 함께 저물어간 비극적인 영웅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전략. 백제를 다루는 기존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중국을 배경의 일부로 삼는다는 점도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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