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씨네클래식
혼란한 세상, 영화로 살다
2001-03-16

심우섭 편 - 홍성기 감독을 만나다

EBS 한국영화걸작선이란 프로그램에서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을 방영하기

직전이었다. 홍 감독이 타계했다는 연락이 왔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김홍준 감독에게 전화를 했다. 지병으로 오랫동안 자리에 누워 있는 홍

감독의 빠른 쾌유를 빈다는 말로 김 감독은 해설을 마무리해놓은 상태였다. 해설은 “홍 감독이 타계했다, 명복을 빈다”로 바뀌었다. 텔레비전을

통해서나마 관객과 참 절묘하게 마지막 인사를 한 셈이지. 영화인장이라지만 쓸쓸했던 영결식을 끝내고 아직도 찬 땅에 그를 묻고 돌아와서,

공연히 섭섭한 마음이 들라치면 나는 그렇게 나를 달랜다. 6·25전쟁이 끝난 뒤, 한국영화계에 불어닥친 열풍은 다름아닌 멜로드라마였다.

전쟁으로 모든 것을 빼앗겨, 곳곳이 무너져 앉은 땅덩어리처럼 팍팍한 가슴에 멜로영화가 선사하는 한 줄기 눈물과 웃음은 삶을 지탱할 수 있도록

하는 무엇이었으니까. 그런 멜로영화의 선봉은 다름아닌 홍성기 감독과 신상옥 감독이었다. 그중에서도 홍성기 감독과는 <애인>(1955)으로

만나 동고동락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잠시 그와 만나기 전으로 거슬러올라 영화판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부터 설명하도록 하자.

전쟁이 발발하던 당시 20대 초입이던 나는 부산 견지동에서 ‘백양’이라는

이름의 사진관을 하고 있었다. 내가 처음 카메라를 만져본 것은 10살 때였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현해탄을 건너 일본 야마구치현의 오노다라는

작은 도시에서 제재소를 운영하기에 이르렀고, 살림이 그런대로 윤택해서 그때로선 흔치 않던 카메라를 손에 넣었을 것이다. 해방이 되자 가족은

귀국선을 타고 돌아왔고, 아버지의 고향인 경상남도 양산 가까운 도시 부산에 자리를 잡았다. 취미가 생업이 되어서, 나는 아마추어 사진작가에서

사진관 주인이 되었다. 전쟁 때문에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대거 몰렸는데, 서울에서 영화 만들던 작자들도 거의 부산에서 모이게 되었다. 영화판을

기웃거린 적 있는 조수 소송권을 통해 만난 이들과 나는 모두 젊은 나이여서 금세 술친구가 되었다. 영화도 결국은 사진 동생쯤 되는 일이겠거니

해서 같은 일 하는 사람입네 하는 동지감도 생겼다. 그러다 53년에 전쟁이 끝나고 각자 저 살던 데로 다들 떠나버리니까 영 적적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서울의 유명한 허바허바 사진관에서 일해보자는 제의가 왔을 때 옳거니, 하고 서울로 향한 것도 그래서였다. 우여곡절 끝에 정착한

곳은 부산 시절 조수 소송권이 있던 종로4가의 자그마한 사진관이었지만. 부산에서 알고 지내던 영화인들도 하나둘씩 찾아와 주었고, 그들과

어울려 촬영현장을 구경하러 다니기도 했다. 54년 <열애> 촬영현장에 갔다가 스쳐지나듯 홍성기 감독과 인사를 했다. 그때만 해도 그와 같이

영화를 찍으리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러다 국회 사진부를 거쳐 일숫돈을 얻어 종로2가에 사진관을 하나 냈다.

처음에는 어찌나 손님이 없던지 손님 끌어모으려고 별짓을 다 했지만, 차츰 실력이 알려지면서 살림살이도 피기 시작했다. 어느날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승모 <중앙일보> 종군기자가 홍성기 감독이 <애인>을 찍는데 자기가 촬영부를 맡았으니 조수로 일해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사실 카메라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던데다 ‘몽타주 이론’이나 ‘사운드 토키’에 관한 영화이론을 독학하고 있었기에 선뜻 그러마고 했다. 이승모를 따라

홍성기 감독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하기 위해 명동성당 밑에 있는 신신영화사로 갔다. 아직 잔설이 녹지 않은 쌀쌀한 봄 날씨에 코끝에 저렸다.

서춘광이 운영하던 신신영화사는 보통 가정집의 모습이었다. 홍성기 감독과는 면식이 있던 터라 별로 어색한 기운은 없었다. 감독은 내가 찍은

사진을 몇장 보더니 조명이 특별하다고 했다. 그 말로 합격 인사를 대신하고 당장 촬영현장에 투입됐다. 조수로서 처음 맡은 일은 카메라 정비와

필름 교체, 촬영 전후 필름 테스트 등이었다. 당시에는 뉴스용 카메라인 미제 아미모 카메라를 주로 썼는데 기계가 금세 노화되어 장비 수리에

한계가 따랐다. 금세 망가지는 기계 앞에 노상 깨지는 건 촬영부 조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승모가 영화판을 떠나게

되어 대신 퍼스트의 자리를 맡게 되었다. 그해에 찍은 <애인>은 <열애>의 실패를 만회라도 하려는 듯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뒀고, 홍성기

감독은 그때부터 흥행감독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19살에 만주 국립촬영소에서 우치다 도모 감독 밑에서 연출을 배운 뒤 최인규 감독의

문하생을 거쳐 <여성일기>로 데뷔한 이후 그에게 처음 주어진 행운이었다.

심우섭| 영화감독·1927년생·<남자식모>·<운수대통> 등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