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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우드 블랙리스트, 반세기의 상처
2002-04-06

광기의 희생양들, 그들의 이름을 복원하라!

아카데미영화제가 열리는 할리우드의 3월은 `축제의 달`이다. 축제의 열기 속에서 영화인들은 함께 과거를 되짚고 현재를 점검해 미래의 비전을 공유하고자 한다. 이 사색 속에는 이들은 피해갈 수 없는 역사의 상처, 혹은 오점과 마주친다. `할리우드 블랙리스트` 사건이다. 몇 년 전 엘리야 카잔이 공로상을 수상할 때 아카데미 수상식장 청중의 반응은 이 사건이 여전히 `현존`함을 반증했는데, 곧 절반 정도의 참석자들이 대원로 선배의 수상을 싸늘하게 외면했던 것이다.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영화인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려는 노력은 다방면으로 존재해왔다. 그리고 지난 3월24일 아카데미영화상을 주관하는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가 <할리우드의 빨갱이와 블랙리스트: 영화산업에서 정치적 투쟁>이라는 전시회의 열어 블랙리스트에 관련된 사진, 오디오, 비디오 자료와 영화클립, 기록화면 등을 공개했다. `정치적 이념과 이력이 영화인 개인의 일생을 좌우한 당시 미국사회의 배경과 그 영향을 후세대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 이번 행사의 취지다. 이로써 블랙리스트 사건은 다시 우리의 `현재`로 되돌아왔다. 또한 지난해에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블랙리스트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다.

그즈음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블랙리스트 생존자 노르마 바르즈만을 만났던 임안자 선생이 바르즈만의 육성 회고와 블랙리스트 사건의 정확한 전개 과정을 정리한 글을 <씨네21>에 보내왔다. 편집자

미국의 영화사를 얼룩지게 한 할리우드의 블랙리스트(요주의 인물 명단) 사건은 트루먼 정부의 극단적인 반공주의에서 비롯된 진보적인 영화인에 대한 가공할 인권탄압을 뜻한다. 트루먼 정부는 1947년 3월 선포된 냉전의 첫신호 `트루먼 독트린`을 바탕으로 `공산주의는 빨갱이의 파시즘`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합법적인 공산당 회원이나 동조자들을 공직에서 쫓아내 이들의 사회적 영향을 차단하려 했다. 그런 과정에서 1932년 이후 오랜만에 국회의 다수가 된 공화당의 극우파는 1947년 6월 `반미국적 활동에 대한 국회 조사위원`(House Committee on Un-American Activities HUAC, 이하 조사위원)을 만들어 정부에 비판적인 시민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즉시 해고시켰고 연방수사국에서도 100만에 이르는 국민을 감시하면서 온갖 위협과 회유 정책을 썼다. 특히 하원의 리처드 닉슨과 연방 비밀정보원 에드거 후버 그리고 상원 조세프 매커시 등이 `공산주의자 사냥`의 핵심요원으로 떠오르면서 악명 높은 `매카시즘` 시대를 열었다.

1947년 10월 매카시즘의 테러는 드디어 할리우드에까지 닿았다. 조사위원은 `영화계의 좌파 침투에 대한 조사`를 명목으로 할리우드를 벌집 쑤신 것 같이 만들었고 이들의 집요한 감시와 축출 작업은 60년대 중반까지 계속됐다. 할리우드의 첫 심판은 나치를 피해 할리우드에서 작업을 하던 독일출신의 작곡가 한스 아이슬러로 시작됐다. 할리우드에서 8편 영화의 작곡가로서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나치저항 음악을 공동작업했던 아이슬러는 조사위원이 `당신은 음악계의 칼 마르크스`라고 비판을 하자 `그렇다면 영광입니다`라고 대답하여 `국회 모독죄`를 받고 추방됐다. 다음은 역시 독일의 정치망명객으로서 문학·영화계로부터 추앙을 받던 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프리츠 랑 감독의 반나치영화 <교수형 집행인 역시 죽는다>의 시나리오를 쓴 죄로 첫 블랙리스트 19명에 올려졌으나 심문을 받은 뒤 미국을 떠났다.

끝까지 침묵을 지킨 `할리우드 10인`

조사위원의 심문은 한결같이 `당신은 공산당의 회원이었던 적이 있었느냐`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당신의 동료나 친구 가운데 누가 공산주의자인지를 알려라`는 위협으로 끝났다. 그리고 고발하면 `우호적인 증인`으로, 고발하지 않으면 `비우호적인 증인`으로 갈라서 전자에게는 직장을 보장해주는 대신에 후자는 즉시 블랙리스트에 올려 할리우드 밖으로 내보냈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연출한 <작은 여우들> 그리고 <막다른 곳>의 시나리오를 쓴 미국의 세기적 극작가 릴리언 헬만과 헬만의 동반자이며 존 휴스턴 감독의 유명작 <말타의 매>의 원작자였던 대쉴 해미트는 헌법에 허용된 묵비권을 이용하여 심문을 거절한 용감한 인물들로 화제가 됐었으나 결국 둘 다 일자리를 잃었고 해미트는 공산당원의 경력이 빌미가 되어 1952년 투옥됐다.

최초의 블랙리스트 19명 가운데 끝가지 침묵을 지킨 영화인은 10명이었다. 이들이 유명한 `할리우드 10인`이며 모두 1년간 감옥살이를 했고, 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헐리우드에서 다시 일자리를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들의 이름이 작품의 크레디트에서 사라지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할리우드 10인 가운데 알바 베시, 레스터 콜, 달톤 트름보 등 7명이 시나리오 작가였고 나머지는 감독 헤버르트 비버르만과 제작자 아드리언 스코트였다. 애초에는 에드워드 드미트리 감독도 10인에 속했으나 그는 감옥생활이 끝난 4년 뒤 마음을 바꾸어 존 베리, 벤 바르즈만 등의 친지와 26명의 동료를 고발했고 그 대가로 할리우드에서 다시 영화를 만들면서 영화학 교수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왕성한 활동력을 과시했다.

제작자 첫 신고자, 잭 워너

할리우드 10인의 굽히지 않는 자세에 불만을 품은 조사위원은 1947년 11월 말 할리우드를 포함한 전국의 제작자를 뉴욕의 왈도르프 아스토리아 호텔로 불러놓고 공산주의자 싹쓸이에 제작자들이 좀더 협조해줄 것을 강요했다. 할리우드의 돈줄이었던 은행관계자들과 중앙첩보원까지 동원됐던 자리였던지라 이들의 위세에 짓눌린 제작자들은 `고용인을 욕보인 할리우드 10인은 보상없이 즉시 해고할 것이며 앞으로 미국의 정부를 무력 또는 비합법적으로 무너뜨리려는 세력을 절대 고용하지 않겠다`는 왈도르프 서명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처음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조사위원의 요구를 선뜻 받아주지 않았던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예를 들어 윌리엄 폭스(폭스 필름), 워너 4형제(워너 브라더스), 사무엘 골드윈과 루이스 메이어(MGM) 그리고 해리 콘(콜럼비아) 등 당시 할리우드를 주름잡던 제작자들은 모두 20년대 유럽에서 이민온 사람들이었고 해리 콘 역시 이민가정의 2세였다. 그런 정서적 배경 때문에 이들은 스스로 진짜 미국인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돈벌이가 된다면 고용인의 사상 따위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40년대 누아르의 명작만 하더라도 프리츠 랑, 윌리엄 와일러, 프레드 진네만 그리고 시오드마크 형제 등의 오스트리아와 독일출신의 감독들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할리우드에서 소련을 찬양하는 공산주의영화가 한번도 만들어진 예가 없었다는 것을 이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제작자 가운데 첫 신고자는 워너 브러더스의 잭 워너였다. 그는 `자신의 제작사에서 12명의 공산주의자를 적발하고는 바로 해고했다`고 보고했다. 할리우드 노조 또한 왈도르프의 모임이 있은 뒤부터 연방수사원을 도와주면서 공산당원 사냥에 앞장섰는데, 당시 할리우드 배우연합의 회장직을 맡았던 로널드 레이건(결국 대통령까지 한다)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리고 엘리아 카잔 감독과 배우 게리 쿠퍼도 조사위원에 과잉충성을 하면서 출세의 기회를 잡았고, 예전의 공산당원 중에서도 동료를 고발하는 사람이 많아 불과 2년 사이에 블랙리스트에 오른 영화인은 3백명이 넘었고 이른바 경죄의 `회색 리스트`의 명단도 그에 못지 않게 길었다. 존 휴스턴 감독은 이런 상황을 견디다 못해 캐서린 햅번, 제임스 캐그니, 험프리 보가트 등을 데리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항의데모까지 했지만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고 그뒤 험프리 보가트는 조사위원 앞에서 `공산당에 가까운 사람과는 앞으로 절대 만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는 할리우드에서 대 스타로 성공했다.

할리우드 등진 영화인들 줄이어

할리우드의 블랙리스트 사건이 터지자 찰리 채플린, 오슨 웰스, 벤 바르즈만, 존 베리, 줄스 다신 등 수많은 인재들이 유럽으로 망명했고 존 휴스턴은 선조의 고향인 아일랜드로 떠났다. 숱한 시나리오 작가들이 이름을 바꿔 글을 쓰는 비극적 상황이 비일비재했고 그중에는 오스카상을 받은 작품도 더러 있었다. 50년대 할리우드 영화는 닉슨이 바랬던 대로 <철의 장막> <빨갱이의 위협> <나는 빨갱이와 결혼했다> 따위의 반공영화가 화면을 채웠지만 관객의 관심을 끌지 못해 제작자들은 이런 영화를 가리켜 `박스오피스의 독약`이라고 했다.

할리우드의 블랙리스트 사건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 후유증이 심각하다. 그럼에도 할리우드와 미 정부는 지금까지 침묵을 지킬 뿐이다. 침묵을 깬 건 오히려 블랙리스트의 희생자측이며 1986년에 설립된 `블랙리스트 크레디트 위원회`와 1999년 카잔 감독의 평생 오스카 수상에 항의를 했던 단체가 이들이다. 유럽에서도 1999년부터 블랙리스트의 영화작가들에 대한 재조명이 여러 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비엔나영화제와 비엔나 영화박물관이 공동으로 개최한 블랙리스트의 50편 영화상영과 영화학자들의 심포지엄 그리고 취리히의 필름포디움 영화관에서 열렸던 30편의 시사회는 매체와 관객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어냈다.

스위스=임인자/해외특별기고가

디자인 박현일

→매카시즘 시대의 영화인들

→시나리오 작가 노르마 바르즈만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