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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도 한낱 프로그램에 불과해
2002-04-09

서기 2029년, 기업 네트워크는 지구를 뒤덮었으나 국가와 민족은 아직 사라지지 않은 가까운 미래의 정보사회. 인간과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사이보그는 인간사회 깊숙이 들어와 있다. 공상과학 애니메이션의 걸작 오시이 마모루(51) 감독의 <공각기동대>(1995)는 디지털 기술과 네트워크가 급격히 발달한 가까운 미래가 배경이다. 사이보그는 ‘의체’와 ‘고스트’라는 두 요소에 의해 조립된다. ‘의체’란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간 모양의 몸체다. 여기에 ‘고스트’라 불리는 일종의 ‘기억 프로그램’이 주입돼야 사이보그는 비로소 개체로서 움직일 수 있게 된다.이 시기에 가장 가공할 범죄는 네트워크에서 벌어진다. ‘인형사’라 불리는 해커는 전자두뇌(전뇌) 네트워크에 침입해 인간의 의지와 기억을 조작할 수 있는 위험인물이다. 일본 정부 안에는 공안 6과와 공안 9과라는 두 개의 특수부서가 있다. 공안 6과는 외교분쟁을 담당하고 공안 9과는 전뇌와 네트워크 관련 범죄를 처리한다. 공각기동대는 9과 소속이다. 공각기동대의 행동대장 구사나기 소령과 부대장 버트 소령은 인형사를 뒤쫓다 그가 공안 6과에서 외교공작을 목적으로 만들어낸 특수 프로그램인 ‘프로젝트 2501’임을 알게 된다. 공안 6과는 2501이란 프로그램이 너무도 정밀하게 만들어져 통제불능 상태에 빠지자 “버그가 있다”는 이유로 그를 회수하려 들고, 2501은 이에 반발해 자신이 “하나의 생명체”임을 주장하며 정치적 망명을 요청한다. 버트가 2501에 대해 “넌 생명이 아니라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하자, 2501은 “인간의 유전자 또한 하나의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그는 또 “컴퓨터가 인간의 기억을 조작하기 시작했을 때, 인간은 그 의미를 숙고했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영화는 ‘의체’와 ‘고스트’로 이뤄진 사이보그가 생명체인가 아닌가를 묻는다. 인간이 ‘육신’과 ‘기억’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인한다면, <공각…>이 상상해낸 시대의 사이보그가 인간과 과연 무엇이 다르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각…>은 <블레이드 러너>(1982)의 적장자이다. <공각…>은 <블레이드…>로부터 ‘기억’이 ‘인간의 정체성’의 핵심이라는 문제의식을 이어받았고, 여기에 네트워크와 가상현실에 대한 상상력을 더해 이를 <매트릭스>(1997)에 넘겨주었다. <공각…>의 제작진은 ‘기억’이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시각이 인간 이해의 한 정점이라 여기는 듯하다. 구사나기의 환청에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내가 어렸을 때는 말과 생각이 어린이와 같다가,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듯 희미하나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해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는 온전히 알리라.”)을 인용한 대목에서 그런 예언자적 긍지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재미있는 발상인 건 틀림없지만,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따지고 보면 해묵은 심신이원론(몸과 마음이 모든 것의 밑바닥에 놓인 두 가지 기초라는 고집스런 생각)의 공상과학적 변주곡에 지나지 않으므로. 12일 개봉. 이상수 기자lees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