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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웅원의 영화와 건축] <아수라>가 보여주는 ‘유예된 죽음’의 세계
윤웅원(건축가) 2017-04-27

<아수라>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아파트 재개발이 성공한 이유는 재개발과 관련된 모든 사람이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개발로 발생하는 ‘잉여의 이익’을 통해 기존의 집주인은 새집을, 은행은 대출이자를, 건설업자는 공사이익을, 개발업자는 자기 몫의 개발 차익을 챙겨간다. 정치인 또한 몫이 있는데, 투표가 가능한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대지 면적에서 건물바닥 면적이 차지하는 비율을 나타내는 건폐율, 대지 면적에 대한 건축물 전체 면적의 비율을 표시하는 용적률, 어떤 용도의 건물을 지을 수 있는지 혹은 짓지 못하는지를 규정한 지역 및 지구는 현대 도시를 제어하는 기본 원칙이다. 건폐율을 통해 도시 외부 공간의 공공성을 조절한다면, 용적률은 도시 밀도에 대한 기준을 제시한다. 특히 도시에서 밀도는 용도제한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데, 이는 경제적인 이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건물의 밀도와 용도에 관한 결정은 도시계획이란 합리적인 절차를 통해서 수립되는 것처럼 포장되지만, 모든 경제적인 이득과 관련된 일들이 그렇듯 이 역시 치열한 정치의 산물이다.

기존의 단독주택들이 더 큰 아파트로 개발될 때 건물 면적의 증가는 개발업자, 은행, 시공사가 필요한 비용을 감당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 밀도의 증가(용적률과 지역, 지구의 변경)는 때때로 도시계획 자체를 변경해서 실행되기도 하는데, 이를 통해 생겨나는 급격한 이득의 증가는 ‘투기’의 전쟁터를 만들어낸다.

지금까지 우리 주변의 아파트는 점점 높아졌다. 단독주택이 5층 주공아파트로, 그다음에 16층, 33층, 50층으로 층수가 증가했다. 용적률이 한없이 상향조정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니 이 재개발의 끝이 어떻게 될지 항상 궁금하다.

사실 오래되고 낡은 아파트의 가격이 계속 올라가는 것은 조금 이상한 일이다. 너무 단순화하는 측면이 있지만 서구 도시의 경우 시간이 지나 낙후된 지역은 땅값이 떨어지고, 가난한 동네로 변하는 과정을 겪는다. 이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낡고 불편한 건물은 가치가 떨어지고, 불편하지만 낮은 가격을 장점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차지가 된다. 그리고 어느 시점이 지나면 떨어진 땅값은 새로운 건물을 지을 수 있는 여력을 제공하게 된다. 반면 실질적인 주거환경의 조건이 아닌, 투자 이익이 우선하는 경제 생태계에서는 낡은 건물의 불편함은 쉽게 미래의 이익으로 상쇄된다. 특히 모든 사람들이 아파트에 ‘몰빵’ 하는 환경 속에서, 미래의 이득은 낡고 불편한 아파트의 현재를 미래로 유예시킨다.

우리는 흔히 도시를 끊임없이 팽창하는 곳으로 알고 있지만 정반대의 방향, 소멸의 길로 들어서는 경우들도 존재한다. 끊임없이 층고가 높아지는 재개발 지역이 있다면 건물들이 점점 사라지는 주거지도 존재한다. ‘줄어드는 도시’의 예로 가장 자주 언급되는 디트로이트는 1970년대 200만명이었던 인구가 현재 60만명 정도로 감소되었다. 인구 감소의 가장 주된 요인은 자동차 산업의 붕괴다. 인구밀도의 감소는 버려진 빈집들을 만들어냈고, 중산층 백인들은 교외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떠나는 선택권을 갖지 못한 가난한 흑인들만이 주로 남아서 주거지역이 유지되었다. 관리되지 않는 빈집들이 차례로 철거된 후, 어떤 지역은 ‘초원 위의 집’ 같은 모습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토지가 미래에 어떠한 이익도 만들어내지 못할 것으로 판단되면 은행도, 개발업자도, 정부도 심지어 땅주인도 그것들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주인들에게 버려진 집들은 지속적인 세금체납이 발생하고, 시는 관리 부담을 이유로 건물을 철거하고 이후에는 공매로 땅을 판매하는 절차를 진행한다. 헐값에도 팔리지 않는 땅의 유일한 구매자는 남은 사람들이다. 여력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 주변의 땅을 구매 혹은 임대해서 집을 넓힌다. 땅은 투자 목적이 아닌, 텃밭이나 농구연습장같이 실제 용도로 사용되는 토지로 변한다. 그렇게 도시는 ‘전원’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겪어나간다. 디트로이트 내부 지역을 완전히 자연으로 되돌리자는 극단적인 아이디어들도 있지만 디트로이트에서 벌어지는 현재의 변화들을 받아들이고 ‘신교외주의’(New Suburbanism)라 명명하는 건축가도 존재한다.

‘줄어드는 도시’ 디트로이트.

모두가 아파트 가격을 따지는 ‘아수라’ 같은 세상

나는 디트로이트같이 도시로서는 자신의 죽음에 가까워진 경우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층고가 높아지는 우리의 재개발 현상도 일종의 ‘유예된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좀비 상태’다. 소멸과 재탄생이라는 자연스러운 과정 대신 경제적 이익이라는 피로 생명이 유지되는 상태에 있다.

<아수라>(2016)는 ‘안남시’라 불리는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다. 영화는 하늘에서 바라본 안남시의 도시 모습으로 시작하고, 지하의 장례식장 학살 장면으로 끝이 난다. 지하의 장례식장이 영화의 마지막 배경공간으로 사용된 것은 아마도 <아수라>의 이야기가 죽음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겉보기에 활기찬 안남시의 모습이 죽음과 관련되어 있는 이유는 그것이 생명으로서의 활기가 아니라 ‘죽음으로의 활기’이기 때문이다.

안남시 시장 박성배(황정민)는 자신이 결정권을 갖고 있는 도시개발에서 직접 이익을 모색하는 정치인이다. 이익을 주면 저절로 돌아가는 조직의 생리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신의 손에 피를 묻혀가며 시장의 자리를 이용하고 있다. 정치인이 직접 폭력을 행사하는 비효율성을 제외하면 이익을 좇는 정치인의 모습 자체가 아주 낯설지는 않다. 시장의 개로 살며 돈을 받아온 형사 한도경(정우성)은 시장의 비리 증거를 캐오라는 검찰의 회유와 자신이 저지른 우발적인 살인 때문에 코너에 몰려 도망칠 수 없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지하 장례식장으로, 시장 박성배, 형사 한도경, 시장의 비리를 캐는 검찰, 시장이 동원한 ‘외노자’ 폭력배들 등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인 ‘모두가 나쁜 놈’들이 몰려들고,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람들은 장례식장을 핏빛 가득한 아수라장으로 만든다.

<아수라>는 요즘 상업영화의 경향과는 다른 느낌을 주는 영화다. 순수한 영화 자체의 매혹으로, 혹은 ‘끝까지 간다’는 지독함으로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어쩌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난 시대의 느낌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에게 알랑거리거나 그들을 현혹하려는 태도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요즘 시대에는 낯선 개념이다.

<아수라>를 보고 느끼는 피곤한 감정의 근원을 한 가지로 지목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영화가 시대의 반영이라는 상투적인 경구를 여전히 믿는다면, 나는 강남 아파트가 8억원, 10억원으로 폭등한 순간이 피곤함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디에 살고 있는가 하는 운으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강남 아파트부터 세상이 ‘아수라’가 된 것 같다. 모두들 내가 그곳에 살지 못했다는 것을 억울해하고, 모두가 아파트 가격만 말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잘살게 해줄 것 같은 기대로 신뢰할 수 없는 대통령을 뽑고, 생명을 비용으로만 환산하는 지옥 같은 시대가 도착했다. 우리 모두는 형광등 불빛 아래, 좀비처럼 빨갛게 충혈된 눈과 쉰목소리로, 멈추지 못하고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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