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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형의 오!컬트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2002-04-10

왜 나는 버림받는 거지?

해외여행이나 출장을 가게 되면 꼭 찾는 곳이 있다. 대학가의 음반가게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LP음반이 매장의 반 정도를 차지하는 중고음반가게이기 십상이다. 더러 괜찮은 음반을 싼값에 구하는 즐거움도 있지만 단지 우리나라에서 구하지 못한 음반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럴 만큼 음악을 많이 알거나 즐기지도 못한다. 내가 좋아하는 건 그런 음반가게의 분위기인 것 같다. 목이 쭈글쭈글하게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머리는 부스스하지만 음악에는 도통해보이는 종업원과 단순 거래관계 이상의 유대와 연대감이 느껴지는 가게 안의 손님들(대체로 행색도 종업원과 비슷하다), 그리고 가게 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근처 클럽의 조악한 공연 포스터와 아티스트 사진들(물론 머라이어 캐리나 백스트리트 보이즈의 사진은 아니다)이 하나의 커뮤니티를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번도 속해보진 못했으나 과거에도, 지금도 부러운 커뮤니티를.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의 주인공 롭(존 쿠색)이 운영하는 챔피언레코드도 그런 음반가게다. 시카고 거리 구석에 처박혀 있는 그의 음반가게는 커뮤니티 멤버라고 할 수 있는 단골 고객들로 근근이 먹고사는 곳이다. 그러나 얼마나 버느냐는 애당초 롭과 종업원인 딕이나 베리에게 중요한 게 아니다. 베리는 딸에게 스티비 원더의 음반을 사다주려고 들어온 중년 신사를 면박해서 내쫓기도 하고 손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자신이 추천하는 음반을 한 아름 안겨주기도 한다. “너네와 취향이 다르다고 손님에게 그렇게 불친절해도 되냐”는 친구의 핀잔에 세 사람은 “된다”고 입을 모은다. 확신범들이다. 그 많은 대형음반몰을 못 찾고 하필이면 이곳에 들어온 중년신사의 운이 나빴을 뿐이다.

“그 사람이 어떤가는 안 중요해. 그 사람이 뭘 좋아하느냐지.” 롭의 이야기는 기호의 확신범들에게 정언명제다. 그러나 사는 건 그렇지가 않다. 롭의 음반가게와 거기 깔리는 음악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이 영화의 진짜 매력은 이 모순에서 생겨난다. 자신의 음악적 지식을 동원해 멋진 여가수와 하룻밤을 보내는 행운도 얻지만 그의 애정전선은 대체로 먹구름이다. 그럴 수밖에. 공통의 취향은 사랑을 발화시키는 데 무엇보다 강력한 인화물질이지만 그건 장작이 아니라 성냥일 뿐이다. 그는 차이고 또 차인다. 모든 게 취향대로만 흘러가면 좋으련만 미래도, 계획도 없이 허구한 날 주제별 톱5만 꼽고 있는 그에게 여자가 질리는 건 당연하다. 가게를 찾는 초보 마니아들에게 그는 ‘쿨가이’지만, 집에 가면 침대에서 딴 놈과 화끈한 밤을 보내고 있을 옛날 애인을 생각하며 머리를 쥐어뜯는 소심증 환자다. 음반 한장 더 파는 데 연연하지 않는 그의 면모는 결국 애인에게 갚지도 못할 빚만 지게 만들 뿐이다. 한술 더 떠 엄마는 “맨날 여자한테 차이면서 도대체 어떻게 살래?” 전화통을 붙잡고 엉엉 운다. “술 마시고, TV 보고, 술 깨면 일하러 가죠.” 나이 삼십을 훌쩍 넘겨 이 따위 대답이나 하고 있는 아들이 있다면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아닌가.

왜 내가 거절당해야 하지, 왜 내가 버림받아야 해. 취향의 순결성을 믿는 사람들은 대체로 버림받는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처음에는 그토록 유혹적이던 것이 나중에는 편집증이나 무능력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취향은 의지로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롭이 겪는 것과 같은 분열증은 이들의 숙명이다. 이미 정해진 파국의 수순을 눈앞에 보면서도 “이 음악 좋아하세요?”로 이성에게 말을 걸 수밖에 없는 취향의 확신범은 그래서 신념의 확신범보다 믿을 만하다. 김은형/ <한겨레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