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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아버지
2002-04-12

성일, 상수의 영화를 보고 회전문을 떠올리다

6-1

논리학의 명제들은 동어 반복들이다. 앞에서도 한 말이지만 홍상수는 이렇게도 말한다. 경수는 세존보살의 점괘에 의하면 “저 사주는 스님 사주가 돼가지고, 산천을 벗삼아 가지고, 산으로 산으로 다녀야 되는 사주기 때문에, 속세에 인연이 없습니다. 인간의 인덕도 없고(중략)”라고 한다. 세존보살의 점괘가 맞다면 결국 경수는 부산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더 떠돌아다녀야 하며, 심지어 “구월 시월에는 몸에 칼댈 일도 있”다. 만일 그가 홍상수 영화의 페르소나라면 그의 주인공은 끝내, 또는 적어도 앞으로 “올래 또 삼재가 들어오기 때문에” 삼년은 그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떠돌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경수의 생각은 다르다. (61신 경주 삼겹살집에서 선영에게 한) 경수의 말에 따르면 “언젠가 운전사 아저씨가 그러더라고요. 야! 인덕이 있다” 홍상수가 누구의 말을 믿을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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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궁금한 것은 경수가 부산에 내려간다고 말하는 대목이다. 부산에는 (선영에게 한 말에 의하면) 부모님이 계시다. 그런데 그는 처음부터 부산에 내려갈 생각을 하고 여행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옷 벗는 술집에서 나온 다음 경수는 서울에 가는 택시를 타려고 한다. 12신에서 경수는 선배 성우에게 “서울 가는 길이야”라고 말한다. 그러나 42신 춘천 버스터미널에서 경수는 부산에 가기 위해 시외버스를 기다린다(경수가 왜 마음을 바꾸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때 명숙이 나타나 경수에게 얼마나 남았냐고 물어보자 15분이 남았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59신 경주역 앞에서 선영이 나타나 떠나려면 얼마나 남았냐고 물어보자 15분이 남았다고 대답한다. 부산에 내려가는 시간에서 항상 15분 전에 여자가 나타난다. 그러나 경수는 명숙을 버리고 춘천을 떠나가지만, 선영을 만난 다음 경주에 남아서 술을 마시고 섹스를 한다. 그건 매듭일 수도 있고, 또는 명숙에서 선영으로의 전이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 순간 이야기는 디졸브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여전히 부모님과의 대면은 지연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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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의문은 다소 산종(散種)되어 있다. 나는 여기서 오리를 갑자기 떠올렸다. 이 영화에서 오리가 가장 먼저 나오는 대목은 세번째 에피소드 14신 성우의 사촌누나 농장에서 성우의 조카 희라에게 경수가 “이게 오리니?” 하고 물어보자 “오리 아니에요, 거위예요” 하고 대답할 때이다. 그 다음 같은 에피소드 22신 춘천 공지천에서 경수는 명숙과 성우와 오리 배를 탄다(그런데 전경은 보이지 않는다. 이 장면은 마스터 숏이 없다). 그리고 일곱번째 에피소드 70신 경주 콩코드 호텔 발코니에서 경수는 엄마 오리 배를 본다(“저건 아무 데서나 보네”). 그런데 경수는 한번도 진짜 오리를 보지는 못한다. 또 하나. 오리 배에는 ‘아빠’ 오리 배가 없다. 궁금한 점. 오리 배에서 명숙은 5년 전에 헤어진 애인에 대해서 말하면서 “처음 만날 땐 굉장히 순수하고 그래서 사귀었는데요, 만나다 보니까 아버지가 보이더라고요”라고 헤어진 이유를 설명한다. 명숙은 아버지가 보이는 남자와 헤어진다. 또는 그렇게 한다.

6-4

홍상수 영화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아버지와 대면하는 것을 핑계를 대서 계속 회피하거나, 아니면 연기한다. 그의 주인공은 아직 오이디푸스가 되기 직전의 인물들이다. 경수는 (춘천에서) 오리 형제 자매들에 둘러싸여 있으며, (경주에서) 엄마 오리를 바라볼 뿐이다. 그는 아직 아버지가 죽여야 할 ‘괴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젠가는 마주쳐야 할 것이다. ▶ 성일, 상수의 영화를 보고 회전문을 떠올리다

▶ 제2장 자막

▶ 제3장 회전문

▶ 제4장 구조

▶ 제5장 착각

▶ 제6장 아버지

▶ 제7장 …그리고 침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