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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구조
2002-04-12

성일, 상수의 영화를 보고 회전문을 떠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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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는 뜻을 가진 명제이다. 메시지, 또는 메모. “사람들 보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라 해놓고, 놔두고 보면, 서로들 서로를 흉내내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에릭 호퍼) 또는 “우리들 행동의 부조리함은 거의가 우리가 흉내내서는 안 될 것(그게 사람이든 뭐든)을 흉내내려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새뮤얼 존슨)라는 말을 2000년 8월 <생활의 발견> 트리트먼트 서문에 홍상수가 (홍보자료에 따르면) 붙여놓았다고 한다. 두 문장의 공통된 단어는 흉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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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내를 내는 것은 여기서 세 가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이루어진다. 그 하나는 등장인물이 다른 등장인물을 따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같은 사건이 다른 사건 안에서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고, 마지막 하나는 같거나 유사한 사물이 아무 상관없는 서로 다른 숏에 등장해서 그 사이의 무관함 속에서 연관성을 유추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흉내는 단지 이미 본 것을 따라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서로 알지 못하는 상대에 대한 텔레파시가 존재한다. 이를테면 명숙이 쓴 문장을 선영이 반복한다. 그런데 선영은 명숙을 만난 적이 없다. 한 가지 더. 선영이 쓴 문장을 경수는 고발장을 쓰면서 다시 베낀다. 그 문장은 “자연현상은 언제나 우리에게 무심한 듯 보입니다”이다. 이 문장을 선영은 맨 앞에 쓰고, 경수는 맨 뒤에 쓴다. 그러니까 세개의 글은 서로 이어 쓴 것처럼 한 문장씩 겹쳐져 있다. 그러나 일직선으로 놓이며, 뫼비우스의 띠처럼 매듭이 묶이지는 않는다. 그건 이 영화의 전체 구조에 대한 알레고리처럼 보인다. <생활의 발견>을 뫼비우스의 띠에 비유하는 것은 내게는 이상하게 보인다. 여기에는 원형 구조가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 두개의 매듭은 같은 방식으로 묶이지 않았다. 또는 이야기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데, 이미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것 같은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텔레파시와 데자뷔는 <생활의 발견>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이 발견은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에 있다. 또는 발견이라고 믿은 것은 이 영화를 다시 보면 대부분 착시-효과이다. 그러므로 대상과 왜상 사이에 있는 구조가 중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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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 흉내에서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반복이 아니라 차이이다. 또는 차이 안의 반복이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그 어떤 흉내도 그대로 반복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선배 성우가 술을 마시면서 몸을 좌우로 흔드는 것을 경주에서 경수가 반복하지만, 그 반복은 서로 다르다. 왜냐하면 경주의 삼겹살집은 4숏으로 나누어져 있다. 여기서 경수와 선영은 술을 마시는데 61신에서는 몸을 흔들지 않는다. 테이블에는 소주 1병과 사이다 1병이 올려져 있다. 그러나 63신에서는 몸을 흔들면서 술을 마신다(그 사이에 있는 62신은 잠시 삼겹살집 바깥으로 나왔다가 하늘을 보는 경수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시간의 생략이 있다. 테이블에는 소주 4병과 사이다 1병이 올려져 있다. 경수의 말에 의하면 몸을 좌우로 흔들면 취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춘천에서 성우는 대리 운전이 없기 때문에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몸을 좌우로 흔든다. 성우는 옷 벗는 술집에서도 몸을 좌우로 흔든 것 같다. 거기서 성우의 파트너는 “몸을 왜 이렇게 흔들어요, 재수 없게”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경수가 갑자기 몸을 좌우로 흔드는 것은 단지 취하지 않기 위해서일까? 성우는 취하지 않아도 여자 옆에 앉은 술좌석에 오면 몸을 좌우로 흔든다. 경주에서 경수는 성우의 면티를 입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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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그 흉내의 반복과 차이에 대해서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또는 놓치는) 대목은 명숙과 선영이 쓴 메모의 마지막 문장의 차이이다. 서로 다른 앞 문장 뒤에 명숙은 “내 안의 당신, 당신 안의 나”라고 쓰지만, 선영은 “당신 속의 나! 내 속의 당신!”이라고 순서를 바꿔 쓴다. 반복은 결코 고스란히 겹쳐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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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문장은 명숙이 경수를 향해서 쓴 “명숙 안의 경수, 경수 안의 명숙”, 또는 선영이 경수를 향해서 “경수 속의 선영! 선영 속의 경수”이지만 동시에 내게는 “명숙 안의 경수, 경수 안의 명숙”으로부터 “명숙 속의 선영! 선영 속의 명숙”으로 읽혔다. 그러나 “명숙 안의 선영, 선영 안의 명숙”으로는 읽히지 않았다. 이 말에 주의해야 한다. 왜 상호 전이가 일어나지 않은 것일까? 또는 나는 그렇기 때문에 홍상수는 나와 당신의 순서를 서로 다르게 썼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그 순서가 중요해진 것이다. 우리(와 경수)는 선영을 만나기 전에 명숙을 만났지만, 명숙을 만나기 전에 이 문장을 알지 못한다. 선영은 2인칭 주어를 먼저 불러들인다. 알랭 레네의 참고할 만한 말. “영화의 숏에 과거와 미래는 없다. 기억과 예감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항상 앞에서 뒤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홍상수는 결코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되돌아오는 경우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심리적으로 자꾸 뒤를 돌아본다. 또는 그렇게 하도록 유혹 당한다. 한번 더 강조할 만한 점. 홍상수 영화의 미학은 플래시백 효과이다. 물론 방점은 효과에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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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의 사례. 나에게 가장 이상한 부분은 두 가지였는데, 그 중 하나는 명숙과 선영이 남긴 문장이다. 같은 문장을 쓸 수도 있었는데 (아마도 의도적으로) 반대로 적혀 있다. 마치 거울에 비춰본 것처럼. 다른 하나는 춘천에서 오리 배를 타고 가면서 우연히 마주친 남자가 경주에서 선영의 남편이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이야기로서는 우연이지만, 또는 그럴 수도 있지만, 그걸 보는 우리는 거기에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우연과 의미 사이를 연결하는 것은 홍상수의 의도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의도에 대한 대답이 영화 안에 없다. 그 의도가 이야기 안의 등장인물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잘못된 해답의 구조가 있다. 22신의 춘천 공지천에서 오리 배를 타고 경수와 선배 성우와 명숙이 이야기할 때 우연히 마주쳐서 라이터를 빌리는 사람을 주목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1시간5분이 지난 뒤에, 그러니까 62신이 더 지난 다음에 갑자기) 83신 경주장에서 경수가 그때 그 남자가 선영의 남편 같다고 선영에게 말할 때 우리는 틀림없이 이미 보았으나 놓칠 수밖에 없는 인물 때문에 이제까지의 이야기의 중심을 다시 설정해야 한다(그러나 여기서 홍상수가 속임수를 썼다고 말할 수는 없다.

꼼꼼하게 영화를 보는 사람이라면 그걸 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명숙과 만난 이후 헤어질 때까지 경수와 명숙과 성우 사이에 끼어드는 인물은 성우의 사촌누나를 제외하면 오리 배를 타고 라이터를 빌리던 그 장면의 선영 남편뿐이다. 이 세심함이란!). 그러니까 홍상수는 이야기에서 우리가 괄호 치고 보는 의미의 영역을 자꾸만 의심하게 만든다. 의미가 없었다고 넘어간 것이 우리를 붙들고, 그 반대로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도 다시는 돌아보지 않는다(이를테면 나는 명숙이 비에 젖은 휴대폰에 남겨놓았다는 메시지가 정말 궁금했다. 그러나 경수는 경주에 간 이후로 그 말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다. 또는 그 ‘알려지지 않은’ 메시지가 경주에서 ‘무의식의 형태’로 집행되는 것일까? 그래서 결국 편지는 도착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외재성의 이름으로 이야기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와의 어떤 거래가 있다. 주목할 만한 점. 경수는 선영의 남편을 알아보는데, 선영의 남편은 경수를 알아보지 못한다. 경주장에서 우리는 선영의 남편의 자리에 불려간다. 그러나 그 자리에 선영의 남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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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없는 그 자리가 채워진다. 그 자리는 그걸 알고 있다고 가정되어진 당신에 의해서 매듭지어진다. 그러니까 이미 충만해 있는 화면에서 불안을 만들어내는 것은 결핍이라고 생각되는 잉여이다. 왜냐하면 반복되어지는 대사와 소도구와 상황과 카메라의 차이가 나타날 때 그 신의 내부에는 그 자체로 문제가 없지만, 그 설명은 외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외부는 여전히 이야기 안이다. 같은 말이지만 사실은 거기에 없는데 분명히 거기에 있다는 스스로의 가정 아래 발견하려는 노력은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노력은 영화의 고정점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자꾸만 중심을 벗어나는 것이다. 매우 비극적인 이야기지만 알고 있다고 가정되어진 자리가 항상 기만당하는 것은 영화의 속성 때문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시간을 통해서 연쇄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되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지나간 것은 기억에 의지해야 한다. 그 기억의 오류가, 순서와 배열을 통해서, 의미를 만들어낸다. 영화 안에서의 지식은, 그러니까 인물과 사건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가정되어진 그 자리는, 사실은 대상에 이끌린 것이 아니라 원인에 떠밀린 것이다. 그러나 그 원인의 자리가 비어 있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 그러므로 홍상수의 영화에서 의미는 지어낸 환상이다. 여기서 의도는 홍상수의 몽타주이며, 위장은 홍상수의 미장-센이다. 또는 어쩌면 그 역이다. 같은 말이지만 홍상수의 영화에서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그 장면은 플래시백 효과를 생산한다. 그런데 그 환상을 만들어내는 매듭을 만드는 사람은 경수나, 명숙이나, 선영이나, 성우가 아니라, 당신이다. 또는 당신은 그 효과-증후이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당신은 경수나, 명숙이나, 선영에 비해서 너무 많이 알고 있다. 그런데 너무 많이 알고 있다는 말은 모순이다. 왜냐하면 지식의 잉여는 결국 그것을 포함하여 이루는 하나의 지식으로서 오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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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더. 신4 영화사 엘리베이터 앞에서 감독은 경수에게 “우리 사람되는 거 힘들어, 힘들지만 우리 괴물은 되지 말자”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을 경수는 춘천에서 두번 반복한다. 그러나 그대로 반복하지는 않는다. 술집에서 나와서 경수는 성우에게 “우리 사람되는 거 어렵지만, 괴물은 되지 말자”고 말한다. 또 호수에서 휴대폰으로 명숙에게 “저, 우리 사람되는 거 어렵지만 괴물은 되지 맙시다”라고 말한다. 감독은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을 경수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 요구에 대한 대답을 경수가 춘천을 떠나기 전에 버스터미널에서 선배 성우가 한다. “경수야! 너 사람한테 사람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말래!” 이 대답 이후 (하여튼) 경수는 이 말을 경주에서 더이상 반복하지 않는다. 이미 자신이 괴물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 어렵기 때문에 더이상 버티기를 포기한 것일까? 또는 사실은 괴물이 되고 싶은데 될 수 없는 자신이 괴롭다는 억압의 표현일까? ▶ 성일, 상수의 영화를 보고 회전문을 떠올리다

▶ 제2장 자막

▶ 제3장 회전문

▶ 제4장 구조

▶ 제5장 착각

▶ 제6장 아버지

▶ 제7장 …그리고 침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