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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4-23

조선희의 이창

우편물을 받아와서 보니 자동차 압류 통지서가 있다. 속도위반 과태료를 제때 내지 않아서다. 나는 통지서를 찬장 서랍에 넣는다. 거기는 먼저 온 자동차 압류 통지서가 수북이 쌓여 있다. 속도위반이나 신호위반도 있지만 대체로 주차위반 때문이다. 우편물을 분류하다 보니 이번에는 자동차 공매처분 예고장이 튀어나온다. 이건 또 뭐야? 건강보험료를 석달치 밀렸는데 이달 말에 내 차를 공매한다는 경고다. 안 돼! 이 드넓은 서울바닥에서 내 발에 달린 바퀴를 떼어간다는 건 말도 안 돼! 차라리 내게서 결혼반지를 압류해가라구!

예술애호가협회 회장 선거가 곧 돌아온다. 예술계에 대해 문외한인 시간강사 친구는 너도 예협 회원이니까 회장선거에 나가보라고 했다. 듣자하니, 예협 회장에 당선되면 좋은 일이 여러 가지다. 우선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집필실이 제공되며, 언제나 공짜로 술을 마실 수 있는 술집 회원권이 한 학군에 한개씩 제공되며, 저녁 시간에 공무로 늦어질 경우엔 베이비시터가 파견돼서 아이들을 먹이고 재워주며, 무엇보다도 제세공과금을 대신 은행에 납부해준다. 나는 홧김에 후보등록을 한다. 등록한 후보가 뜻밖에 두명뿐이어서 제법 게임이 된다. “인생은 저지르는 자의 것”이라는 친구의 충고가 옳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 ‘조 후보, 회비 연체 3년’이라는 대문짝만한 제목으로 기사가 실렸다. 사실이다. 찬장 서랍에는 자동차 압류 통지서 말고도 예협에서 온 회비납부 지로용지도 잔뜩 있다. 입회비를 낸 이래로 한번도 회비를 낸 적 없다.

저녁에 TV뉴스를 보는데 갑자기 내 친구가 화면에 나온다. 하지만 반가운 것도 잠시, 내가 휘트니 휴스턴이 R&B가 아니라 재즈가수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강변한 적 있다고 폭로한다. 사실이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그 무식함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예술평론가로서 이건 정말 치명적이다. 이미 5년도 지나, 윤리적 공소시효가 지난 사안이건만. 야, 우리는 친구 아이가. 어찌 너마저도.

다음날 아침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현관의 조간신문을 집어온다. “조 후보, 베스트셀러 작가 모씨를 음해.” 내가 최근 어느 술자리에서 한 얘기가 실려 있다. 내가 오만방자하게도 어떤 베스트셀러 소설에 대해 “나는 그거 다섯페이지 읽고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어요”라고 말했다 한다. 사실이다. 내가 어떤 소설을 도저히 읽기 괴로워서 다섯페이지 읽다 만 적 있다. 그런데 그 책이 100만부 넘게 팔렸다는 얘길 듣고 나로서는 꿈도 못 꿀 100만부라는 숫자에 경기를 일으켜 순간적으로 말이 심하게 나와버린 것이었다. 게다가 술기운이 아니었다면 ‘쓰레기통’ 운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당대의 베스트셀러 작가들에 대해서는 늘 존경심을 품고 있다. 작품에 대해 비평적으로 뭐라고 왈가왈부하든 그들은 동시대 대중을 설득해내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게 내 진심이라고 설명한들 기자들이 믿어줄까. 그런데 이 이야기는 내 단골 술집의 주인이 증언한 걸로 나와 있다. 으악! 나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저건 노다지다, 노다지야! 내가 저 술집에서 폭탄 맞고 필름이 끊긴 게 무릇기하이며, 운수 사납게도 엉뚱한 사람하고 시비 붙은 건 또 무릇기하인가. 아니나 다를까, 상대 후보 진영에선 앞으로 하루에 한건씩 폭로하겠다고 자신감을 보인다. 그럴 테지. 하루에 한건씩 폭로해도 3년은 갈 거다.

나는 매일 아침 오금을 저리면서 조간신문을 주워온다. 약속한 대로 정확히 하루 한건씩이다. “인세 떼어먹는 출판사 사장은 사형시켜야 돼.” “배우가 연기를 못하면 죽어야지.” “요즘은 쥐도 개도 대학교수 한다니까.” 오빠가 전화해서 화를 낸다. “그럼, 나는 쥐냐 개냐.”“조 후보, 00감독이 여배우 00씨를 따먹었다고 발언해 물의.” 감독과 여배우쪽에서 모두 내게 명예훼손으로 소송하겠다고 선언했다. 아니, 소송도 소송이지만, 이 말이 어떻게 상대 후보 진영에 흘러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하늘땅 별땅, 남편에게만 베개송사로 한 이야기인데. 그러면 남편까지도 벌써? 안 돼!

휴, 꿈이었구나.

자동차 공매처분 예고장 어디 뒀지? 나는 찬장 서랍에서 압류통지서들 사이에 섞여 있는 공매처분 예고장을 꺼낸다. 이달치 아파트관리비하고 도시가스요금 청구서도 어디 있었는데. 벽의 달력을 본다. 오늘이 마감날이다. 나는 영수증들을 모아서 들고 은행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선다. 조선희/ 전 씨네21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