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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수 연출 <슬픔의 노래>
2002-05-02

가해자의 비극

정찬(소설가)이 ‘연극 구경 오’라고, 더군다나 일요일에 전화를 건 것은 뜻밖이었다. 잘 모르는 사이여서가 아니라 좀체 그런 권유를 하는 법이 없었던 까닭이다. 아니, 권유는커녕 내가 무슨 (쓸데없는) 단체 일 부탁할까봐 몸을 사리는 편이다. 일단 걸리면 그가 거절을 못하는 성격이고, 그래서 나의 부탁이 집요하므로, 더욱 그렇다. 이화동 4거리 김동수 플레이어하우스로 와라, 고 했을 때 ‘김동수’는 낯설었는데, 그보다 ‘플레이어하우스’는 더 낯설었다. 하여간, 어지간히 사람이 없는 모양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긴급 귀대명령을 받은 휴가병처럼 정말 모처럼 일요일에 공연장엘 갔다.

김동수는 체구가 크지 않지만 호탕한 표정에 광대(피에로) ‘끼’가 잔뜩 묻어났는데, 48년생이라서 너무 놀랐다. 역시 공연예술쪽 사람이 명쾌하고, 잡생각이 없어. 글쟁이란 원고지 붙잡고 씨름하느라 사소해지고 쩨쩨해지고 야비해지고 끝내 성깔이 잔혹해지는 법인데….

연극은 정말 한 ‘진지’했다. 비극은 그래도 낫지. 관객이 없으면 암담함 속으로 더욱 진지해질 수 있으니까. 코미디는 관객 없으면 정말 썰렁하고…. 여전히 ‘시니컬’이 아니고 ‘천진-호탕한’ 그 농담조차 모종의 무게로 가라앉고 무대는 오랫동안 암전. 그뒤, 나와, 역시 ‘초대’받은 정과리(문학평론가) 외 10명의 관객을 아랑곳하지 않고 연극은 스스로 제 무게를 쌓아나갔다.

배우들의 연기는 앙상블이 절묘했고 그 앙상블을 아프게, 충격적으로, 깼다가 다시 일상 속으로, 더 아프게 봉합하는 박운형 역 박지일의 ‘광란신’은 압권이었다. 무대사용도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에, 조명 자체를 진압군 헤드라이트로 사용하는 과감함이 적절하게 결합되어 그로토프스키의 ‘가난한 연극론’의 대사 혹은 이론뿐 아니라 형상화를 보는 듯했다. 원작은 ‘가해자가 무슨 피해자냐’는 식의 논란을 야기시켰지만, 정찬이 소설로 형상화했던 것은, 훗날 좀더 편하게 드러나듯 폭력과 죽음 지향의 등식, 그리고 그 등식의 존재- 보편화라는 종교- 신학적인 문제였던 듯하다.

문제는, 첫 장면을 마지막 장면에 반복한 것. ‘진지’와 ‘반복’은, ‘진보’와 ‘여전히’란 말이 그렇듯, 어울리지 않는다. 하여간, 동수 형. 어디까지 진지하면 활짝 대문에 닿을 수 있겠습니까. 음악은 흐르지마는. 김정환/ 시인·소설가 maydapoe@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