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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페미니즘`과 `그 사회주의` (1)
2002-05-08

신현준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두주 전 김규항이 이 지면에 ‘그 페미니즘’이라고 표현한 페미니즘은 나도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는 나의 취향에 영 맞지 않아서 다른 세계의 일 같고 그래서 별 ‘관심’이 없다. 8년째 육아와 가사를 분담해 오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조차 설득력이 없다면, 그 페미니즘은 무언가 공허한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래서 ‘욱’할 때면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여자들이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한 칭얼거림 아냐?”라고 비아냥거릴 때도 있다. 막말로 나보다 잘 먹고 잘살 것 같은 사람들이 하는 운동을 내가 지지할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을 공적으로 피력하기는 싫다. 이유는? 무엇보다도 ‘한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일’을 겪어보지 않고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즉, 내가 가진 것들 가운데 ‘한국 여자 가운데 최고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라도 도저히 갖지 못한 것’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적으로는 소신을 피력하더라도 공적으로는 자제한다는 ‘이중성’이 그 페미니즘에 대한 나의 알량한 ‘애티튜드’였다. 그러니까 반대하지도 않지만 찬성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그 페미니즘에 대해 내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윤리다.

두 번째 이유는 페미니즘 비판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효과가 달라질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신현준’이 하는 페미니즘 비판은 특정한 코드로 말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필자의 정체성은 ‘386세대 운동권 출신 아저씨’라는 딱지를 달게 될 것이고 그 세대 특유의 남성 쇼비니즘의 폐해가 도처에서 드러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비판은 하나마나일 게 뻔하기 때문이다. 나의 의도와 무관한 효과를 드러낼 주장을 하고 싶지 않았다.

따라서 나 같은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 ‘페미니즘 비판’을 한다면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 효과는 선정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만약 이런저런 비판이 올 것을 예상하지 않고 글을 쓴다면 순진하거나 아둔한 사람일 것이다. 게시판을 시끄럽게 달구고 사람들의 입소문이 나게 하는 것은 선정주의의 ABC에 속하고 편집부는 만면에 미소를 띄우고 덩실덩실 춤추고 싶을 것이다. 국가보안법만 적절히 피해갈 수 있다면, 그 내용이 사회주의 아니라 사회주의 할애비라도 상관없다.

<씨네21>은 상업적 잡지다. 이건 <씨네21>이 ‘돈에 환장해서 별 짓 다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장의 냉정한 평가에 따라 작동한다’는 의미다. 상업적 잡지라는 형식은 ‘아무 거나 써도 된다’는 이 지면의 불문율마저 이런저런 방식으로 제약한다. ‘사회주의’와 ‘진보’나 ‘좌파’를 논할 수 있고, 심지어 그것을 선동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의 최종적 의미는 필자 개인이 옹호하는 사상에 의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배급망을 통해 글을 접하는 다양한 독자들이 그것을 어떻게 수용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대중매체의 속성은 이런 것이다. 요는 이 지면에 피력된 견해가 독자에게 투명하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언젠가 한번 써먹은 말이지만 소비자본주의의 명제는 “나는 구매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는 <씨네21>의 독자의 철학일 것이다. ‘문화적으로 세련되면 정치적으로도 올바를 수 있다’는 환상 비슷한 것 말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구매할 상품을 공급하는 ‘그 사회주의’의 철학은 “나는 주장한다. 고로 나는 팔린다”일까. 그렇든 아니든 이런 말은 ‘동업자 정신 위반’이자, 결국은 ‘제 얼굴에 침 뱉기’일까. 좀더 생각해보고 한번 더 써야겠다. (다음번에 계속됩니다.)신현준 http://homey.w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