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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보고 결혼제도를 고민하다
2002-05-10

맞아, 괜히 결혼했어

●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감독 유하씨는 말에 대한 감수성이 매우 뛰어난 시인이다. 누구도 말에 대한 감수성 없이 시인이 될 수는 없겠지만, 유하씨의 언어감각은 여느 시인에 견주어 특히 민첩하다. 첫 시집 <무림일기>에서부터 최근 시집 <천일馬화>에 이르기까지, 그는 그런 날랜 말놀이의 부력으로 독자들에게 어질어질한 부양감(浮揚感)을 베푼 바 있다. 그의 말놀이가 얼마나 매력적인가 하면, 독자들이 그 말놀이에 정신을 팔다 그의 시가 지닌 메시지의 핵심을 지나쳐버릴 정도다. 그의 몸은 언어와 버성기지 않는다. 그는 조각하듯 언어를 깎아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깎여져 몸 안에 갈무리된 언어를 아무 때나 꺼내 자유자재로 레고놀이를 수행한다. 그는 공기를 숨쉬듯 언어를 숨쉬며, 마침내 말과 한몸이 되어 통정한다. 말과의 접착도에서 시인 유하씨의 맞수로 내가 얼른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그와 동갑내기인 불세출의 논객 진중권씨 정도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보니 유하씨는 말놀이에만이 아니라 그림놀이에도 뛰어난 것 같다. 하기야 유하씨가 시에서 수행한 말놀이는 말-이미지 놀이이기도 했다. 아쉽게도 나는 유하 감독의 첫 작품인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를 보지 못했다. 그 영화는 상업적으로 별 재미를 못 본 모양이고, 본 사람들 얘기로는 작품으로서도 그리 탐스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볼 만했다. 그것은 유하씨가 겉멋으로 충무로에 발을 들여놓은 문인 출신의 얼치기 영화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만교씨의 원작 소설을 읽지 못한 나는 이 영화의 이색적인 서사 줄기가 전적으로 원작자의 것인지 부분적으로 감독의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두 주인공이 주고받는 재치있는 대사들의 일부는 유하 감독의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그는 이 그림놀이에도 자신의 말놀이 재능을 충분히 투입했다.

일부일처제가 계급사회의 산물이라는 것은 원래 좌파의 주장이었지만, 요새는 좌우지간에 입 가진 자들은 다 그렇게 말하는 모양이다. 그러니 아마 그 말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일부일처제가 아닌 사회를 생각하면, 홀가분하기에 앞서 불안하다. 사실 일부일처제는 계급사회가 고안해낸 수많은 제도 가운데 약자를 배려한 매우 드문 예에 속한다. 일부일처제에 바탕을 둔 결혼제도가 없다면, 성이라는 재화는 지금보다 훨씬 더 불평등하게 분배될 것이다. 권력과 재산을 가진 남녀, 성적 매력을 가진 남녀는 그 재화를 무한대로 소비할 수 있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남녀는 늘 독수공방을 감수하게 될 것이다. 일부일처제가 엄존하는 지금의 현실이라고 그것과 뭐가 다르냐는 반박이 있을 수 있겠지만, 법과 제도를 통해서 일정한 억제가 가해지는 경우와 그런 위선적 제도나마 없는 경우는 성의 분배 양상이 크게 다를 것이다. 성 소비의 자유와 다양성을 진작시키기 위해서라면, 나는 차라리 지금의 결혼제도를 그대로 둔 채 공창제를 운영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이 공창제에서 성적 쾌락의 일차생산자는 여성일 수도 있고 남성일 수도 있다. 또 이 제도 아래서 성적 쾌락의 일차생산자가 지금의 사창가에서처럼 중간상인들에게 착취당하지 않도록 세심한 법적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자크 아탈리라는 사나이는 이라는 책에서 결혼과 가족제도를 좀더 급진적인 상상으로 구부러뜨린 바 있다. 그는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말하는 대신 미치지 않을 수 있는 결혼 형태를 구상한다. 아탈리는 개인주의와 시장원리가 지금의 가족 형태를 그 뿌리부터 흔들 것이라고 예측하며 동시적 가족을 상상한다. 멀지 않은 미래에 사람들은 이혼/재혼을 통해 단속적(斷續的) 가정을 갖는 데 만족하지 않고, 동시에 여러 가정을 원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일부다처제와 일처다부제다. 또는 다부다처제가 될 수도 있겠지. 지금의 법률 용어로 말하면 중혼이 유행한다는 것이다. 여러 사람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 권리가 처음에는 관습의 수준에서, 궁극적으로는 법적 수준에서 보장될 것이라는 것이 아탈리의 예측이다. 그때 남녀 관계에서 최고의 가치가 되는 것은 감정의 솔직함이다. 사람들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동시에 여러 가족을 인정하게 되고, 남자든 여자든 동시에 여러 배우자를 지닐 수 있게 된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연희처럼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말이다. 그런데 내 생각엔 그 경우에도 성이 공정하게 분배될 것 같지는 않다. 남편이라고 똑같은 남편이 아니고 아내라고 똑같은 아내가 아니어서, 성의 부익부 빈익빈은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메시지가 결혼은 미친 짓이라는 거라면, 유하씨는 적어도 관객 한 사람은 설득한 것 같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나도 모르게 되뇌게 되더군.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괜히 결혼했다고. 앞서 한 말들과 모순되지 않느냐고? 물론 그렇다. 앞서 한 말들은 무대용 발언이고, 방금 한 말은 분장실용 발언이다.고종석/ 소설가·<한국일보> 논설위원 aromach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