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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의 오! 컬트 <트루먼 쇼>
2002-05-15

동그란 지구상에 설치된 인스턴트 행복

며칠 전에, 오래도록 알고 지냈던 한 미술대학 선배가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다. ‘결국’ 이민을 갔다. 한반도 남단에서의 삶을 딱 40년 채우고는 중학생이 된 아들을 데리고 떠났다. 우리는 축하할 일도, 아쉬워할 일도 아닌 복잡한 기분으로 그 선배와의 마지막 밤을 덤덤하게 보냈다. 그 마지막 밤에 내가 해야 할 일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이었다. 지나온 날들에 대한 회한과 절망의 경험들, 부질없음과 가망없음, 시시포스처럼 반복되어야 할 의미없는 삶의 쳇바퀴에 대한 반감들. 그리고 이제 또다시 도전할 불확실한 희망의 나라에 대한 기대감들, 새로운 삶의 계획들, 가늘게 떨리며 두서없이 풀어내는 그 이야기들을 그저 들어주는 것말고는 달리 해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젠장, 이제는 모두 알고 있다. 희망의 나라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정말 끔찍한 것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다. 그렇다. 지구는 둥글다. 아무리 멀리멀리 떠나도 결국 제자리에서 맴돌 수밖에 없는 동그란 공 하나의 표면을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건설된 수없이 많은 국가들과 시스템과 정치와 경제구조들은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뉴질랜드에서도, 호주에서도, 캐나다에서도 매일매일 설거지는 해야 하고 집세를 벌어야 하고 사회적 존재로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야 하고 그래서 안정적인 포지션을 하나 차지해야 하고 제멋대로 생겨먹은 인간들과의 관계를 참아내야 한다. 그것을 유능하게 척척 잘해내고 그 성과 자체에 삶의 가치를 둔다면 삶은 그렇게 고단하기만 한 것을 아닐 터이다. 하지만 삶의 비극은 개인의 자아가 꿈틀대는 순간에 시작된다. 자신이 일개미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는 순간에 시작된다. 그리고 아주 치밀하고도 계획적인 교육을 통해 일개미로서 세뇌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눈치채는 순간 삶은 슬픔을 넘어 분노와 적개심으로 뒤범벅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그 원흉이 누군지 알 수가 없다. 이 거대하고도 끔찍한 시스템을 창조하고 인간을 사회적 존재라고 집단 최면을 걸어 일개미처럼 만들어놓고 고만고만한 배우자를 짝지어주고 아파트와 월급봉투만 보장해주면 행복해하는 존재로 만들어버린 그 원흉이 보이질 않는다.

벗어나고 싶다. 이것은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 아니다. 선택의 여지도 없이 내가 태어날 때부터 세상은 그렇게 설계되어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삶에 있어서 게으른 태도를 가진 불평분자의 푸념일 뿐인가? 천만에. 바보가 아닌 이상 속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생이 얼마나 덧없이 소모되고 있는지 당신들도 다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우리는 우주 공간에 덩그러니 고립되어 있으니까. 여기 이 지구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이상, 이 지구상에 설치된 사회적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되도록이면 심란한 의심은 들춰내지 말고 이 안에서 어떻게든 행복을 찾아보자는 게 서로를 위한 예의일 수도 있겠다.

트루먼은 노를 저어 나아갔다. 그리고 시스템의 방벽 끝에 도달했다. 아아. 세상의 끝이라니 그 얼마나 꿈같은 일인가. 나도 가고 싶다. 떠나고 싶다. 벗어나고 싶다. 세상의 끝이 있기만 하다면, 10년이 걸리든, 한평생이 걸리든 노 저어 나가리라. 정말로 지구가 둥근 것이 아니고 평평한 지평으로 그 끝을 알 수 없다면, 그리고 세상의 끝에서 또 다른 세상의 문을 만날 수만 있다면, 그래서 내가 내 삶의 어떤 갈래를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그 선택의 기로를 찾아 기꺼이 떠나가겠다. 그 여정이 멀고 힘들지라도. 혹은 가다가 늙어 죽을 지라도.

지구는 인간의 유배지. 정해진 코스대로 사회적응 교육을 받아야 하고, 일정량의 노동을 해야 한다. 물론 운동시간도 마련되어 있다. 감옥도 생각하기에 따라 안락한 삶일 수 있다. 하지만, 끝없이 탈출을 시도한 ‘빠삐용’이 스스로 시인한 자신의 죄목은 ‘인생을 허비한 죄’였다는걸 기억하는지…. 김형태/ 화가·황신혜밴드 리더 http://hshband.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