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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원작`을 위하여
2002-05-15

신경숙의 이창

일본의 마루야마 겐지라는 소설가는 영상이 따라올 수 없는 소설을 쓰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철저히 문체위주의 글을 쓰는 것으로 자신의 공언을 지켜나가고 있다. 그의 저서인 소설가의 각오를 읽다보면 엄격하고 철저한 그의 작가정신 때문에 마음이 얼얼할 지경이다. 쓰고 싶은 소설만을 쓰기 위하여 그는 생을 아주 단순화시켰다. 결혼은 했으나 아이를 낳지 않았고 최소의 생계비로 버티기 위하여 도시를 떠났으며 소설을 쓸 수 있는 체력과 긴장을 위하여 가혹할 정도로 몸을 단련시켰다. 그 영향일까. 그의 작품은 비루한 일상이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으나 소수의 독자들로 하여금 눈을 부라리게 할 만큼 강렬한 마력을 내뿜는다. 그의 뜻대로 영상이 따라올 수 없는 소설이어서인지 그의 작품이 영상화되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한때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에 푹 빠져 지낸 적이 있었다. 이해가 잘 되지 않은 대목들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매혹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도 다시 읽기를 반복하는 몇 권 안 되는 책 중의 한 권이 <죽음의 한 연구>이다. 박상륭의 소설을 완벽하게 이해해보겠다는 나의 욕망이 부질없이 느껴진 것은 그의 소설을 기존의 독법으로 읽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이다. 지금의 나는 젊은날처럼 박상륭의 소설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지 않는다. 시나 경전을 읽듯이 내 마음대로 읽는다. 아무 장이나 펼쳐들고 눈길이 멎을 때까지 그냥 읽어내리다가 덮어놓는 식이다. <죽음의 한 연구>가 <유리> 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된다고 했을 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박상륭 소설을 어떻게 영화로 만든다는 것일까, 궁금했으나 내 식으로 유지시키고 있는 박상륭 소설 읽기를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영화가 개봉되었는데 보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흔히 환타지라 부르는 영화나 소설들 특히 SF나 가상현실이 등장하는 것들을 일부러 사서 읽거나 애써 찾아가 보지는 않는다. <에이리언>이 열광적으로 후속작들이 만들어지고 있었을 때도 단 한편도 보질 않았다. 4편이 나왔을 때던가. 그때 내 마음을 애타게 하던 사람이 <에이리언> 4편이 개봉되었다면서 함께 보자고 했다. 그와 함께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 기뻐서 내 생전 처음으로 영화표를 예매(그는 일터에 있었으므로) 하러 서울극장에 갔는데 와, 세상에 종로3가까지 줄이 이어지지 않는가. 그 줄의 끄트머리에 붙어 있다가 표를 끊었다. 사람에게만 마음이 있었지 영화에는 시큰둥했는데 막상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는 내가 그보다 더 <에이리언>에 빠져 들었다. 연초에 <반지의 제왕>을 보러 갔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어찌어찌 세 사람이 영화를 보러 나섰을 때 나는 <반지의 제왕> 같은 영화는 어린이들이나 보는 영화 아냐? 깎아 내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재미있으면 얼마나 재미있겠나, 은근히 그날 밤 표를 끊을 수 없기를 바래기까지 했다. 그런데 무색하게도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는 세 사람 중에 내가 <반지의 제왕>에 가장 몰두했다. 얼마나 재미있던지 영화가 끝날까봐 전전긍긍이었다. 완결편이 아니라 제 2부는 올 크리스마스 때를 기대해달라는 자막이 나왔을 때 아니 뭐야? 어떻게 그때까지 기다려? 영화제작자가 야속할 지경이었다. 여세로 다음날 밤엔 또 <디 아더스>를 보러갔는데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마냥 또 마음을 홀딱 빼앗겼다. 밤길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이구, 무슨 영화들이 이렇게 재미있담, 이러니 책은 누가 읽겠는가, 싶어서.

<반지의 제왕>이나 <디 아더스>나 다 원작이 있는 영화들이다. 나는 영상이 범접할 수 없는 소설을 쓰겠다는 마루야마겐지를 존중하지만 내 소설을 영화로 만들겠다고 나섰던 사람들에게 원작사용을 수락한 사람이기도 하다. 영화문법과 소설 문법은 기본적으로 다르다고 여기기에 원작을 수락한 다음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대신 풍금이 있던 자리 같은 작품은 문학작품으로만 읽혔으면 하고 생각되어 영화제의를 거절했다. 순전히 내 개인적 취향에서 비롯된 결정일 뿐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어쨌든 영화와 소설은 서로 다른 장르이긴 하나 각색의 과정을 성공적으로 거치기만 하면 더할 나위 없이 친밀한 관계가 된다. 최근에 공동경비구역 JSA나 결혼은 미친 짓이다, 같은 작품이 영화적으로 성공을 거둔 것은 각색의 공정을 잘 거친 몫이 컸다고도 생각한다. 그런데 각색에 대한 영화계의 관심은 무척 소극적이라는 느낌을 갖는다. 어느 영화제에서 각본상으로 파이란 편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원작이 있어 자격이 안 된다고 했다. 원작이 있어서 안되면 각색부문의 상이 따로 있어야될 것 같은데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그 영화제만이 아니라 다른 영화제에서도 마찬가지 아닌가 싶다. 국외의 아카데미시상식에는 각색상이 마련되어 있는 모양이다. 각색의 공정은 원작을 성공적으로 영화화 시키는데 결정적인 요인 가운데 하나라는건 누구나 다 인정할 것이다. 상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에 대한 평가를 해주는 제도적 장치가 된다면 새로운 활력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