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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최고 제작자의 실망스런 9·11 테러 시각
2002-06-29

지난 19일 할리우드 최고의 흥행사 제리 브룩하이머를 인터뷰하기 위해 뉴욕에 출장을 갔다.

뉴욕에서 짬을 내어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은 9·11 테러의 현장이었다. 지하철 지도를 보고 세계무역센터와 가장 가까워 보이는 코틀랜드 역을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그랬더니 사람들은 간첩이라도 만난 표정으로 방향을 알려주었다. 그 역은 지난해 9월11일 이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서 있던 지름 1㎞ 남짓한 빈터는 새 건물을 짓기 위한 공사장처럼 변해있었다. 50m쯤 되는 거리엔 현장에서 찾아낸 온갖 모자와 옷가지, 신발, 깃발, 곰인형 따위들이 담장에 빼곡이 붙어 사람들의 발걸음을 묶어두고 있었다. 쌍둥이 빌딩을 실종자들의 얼굴로 가득 채운 그림과, 성자의 기도문을 연상시키는 글도 붙어 있었다.

“아무도 이런 곳을 반길 순 없으리라. 그러나 내가 오늘 스스로에게 감사할 수 있는 이유를 묻는다면 이런 것들 때문이다 : 여기서 난 태양이 부끄러워할 만큼 황금처럼 빛나는 사람들을 만났다. 여기서 난 진정 강한 힘은 왕으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나온다는 걸 배웠다. 여기서 난 아무런 희망이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조차 다시 희망을 품는 법을 배웠다.”

어디에도 부시처럼 단정적으로 테러의 ‘배후’로 추정되는 이들을 저주하거나 복수를 외치는 글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뉴욕시민이 겪은 이 ‘원인 모를 끔찍한 재앙’을 견뎌내기 위한 안간힘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나는 거기서 폐허를 희망의 샘으로 만드는 보통사람들의 힘을 보았다.

그리고 브룩하이머를 만났다. 그가 제작한 〈배드 컴패니〉는 9·11 테러로 개봉이 연기됐다가 올 여름 세계 동시 개봉한다. 그 때문인지 그를 인터뷰하며 내내 쌍둥이 빌딩터의 폐허가 떠올랐다. 아랍계 테러리스트가 뉴욕 한복판에서 핵무기를 터뜨리려다 제지당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영화는 그 테러리스트가 왜 그런 깊은 증오를 품게 됐는지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다. 브룩하이머의 논리 또한 그만큼 단순했다. “테러리스트는 여자와 아이를 막론하고 죽인다. 그래서 악이다.” 세상의 어떤 행동도 작용에 대한 반작용이지 일방적인 건 없다. 쌍방성을 인정하지 않는 건 유아적 사고다. 새삼스런 얘기지만 뉴욕시민이 겪은 불행은 미국의 일방적인 친이스라엘 정책이 빚은 쌍생아다. 세계적 배급망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입을 벌어들이는 이가, 미국 중심의 일방적 시각에 머물러 있다는 건 지극히 실망스런 일이었다. 나는 거기서 쌍둥이 빌딩 터보다 더 거대한 정신의 폐허를 보았다.

이상수 기자lees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