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News & Report > News > 국내뉴스
비운의 복서 김득구 20년만에 스크린 환생
2002-06-29

<친구> 의 곽경택 감독-유오성 콤비의 재결합, 70억원의 총제작비, 거대한 야외특설링 세트와 연인원 3만명을 넘는 엑스트라 동원, 1982년 벌어진 세계 타이틀에서 안타깝게 쓰러져 끝내 숨졌던 김득구 선수의 생애 영화화…. 제작 당시부터 화제를 몰고 다녔던 영화 〈챔피언〉이 28일 관객들과 만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김득구는 결혼식도 치르지 못한 아내와 아들을 남기고 떠난 ‘비운의 복서’로만 기억된다. 하지만 〈챔피언〉은 밑바닥 인생의 성공담으로 채워진 영웅 이야기도, 눈물을 처음부터 강요하는 비극도 아니다. 곽 감독은 몸뚱어리 하나로 치열하게 자신과 싸우다 간 사람으로 그의 온전한 삶을 기억해냈다.

강원도 바닷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김득구(유오성)는 1972년 무일푼으로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 잡상인으로 끼니를 이어가던 그는 눈에 띈 권투시합 포스터를 보고 무작정 동아체육관의 문을 두드린다. 난타전 끝에 첫 프로시합 승리를 거둔 그에게 김현치 관장(윤승원)은 돈봉투를 건네주며 말한다. “매맞고 번 돈이다. 알지?”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그들이었다. 힘든 막노동과 연습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곤로 위에 라면을 끓이며 달걀을 넣을까 말까 고민해야 했다. 어두운 결말이 예정돼 있음에도 영화 속 김득구의 삶은 칙칙하지 않다. 경미(채민서)와의 수줍으면서도 소박한 로맨스, ‘여자는 인생의 걸림돌’이라 써붙였던 글을 슬쩍 ‘디딤돌’로 바꿔놓는 유머, 함께 멍든 얼굴을 달걀로 문지르는 동료와의 진한 우정 등 영화의 일화들은 진정으로 그가 이 세상에서 사랑하고 우정을 나누고 행복했음을 보여준다. 〈친구〉에 이어 70년대의 풍경을 잡아내는 솜씨도 여전하다. 땀냄새까지 묻어나는 듯한 체육관, 주황색 바가지로 물 붓던 공중목욕탕, ‘아저씨 오라이~’를 외치는 차장언니뿐 아니라 엑스트라의 머리모양까지 세심하게 되살려냈다. 각기 다른 콘셉트로 찍었다는 경기모습과 수천명의 엑스트라와 컴퓨터그래픽이 동원된 미국 경기 장면도 볼거리다. 무엇보다 때로는 어눌한 강원도 청년으로, 때로는 결연한 복서로서의 표정을 보여주는 유오성의 연기는 완전히 물이 올랐다.

10대가 된 김득구의 아들이 먼지만 쌓여 있는 동아체육관을 찾는 마지막 부분에서 숨진 김득구는 ‘희망’으로 되살아난다. 한때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던 ‘권투’에, 아직도 묵묵히 그 길을 걷는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다.

확실히 〈챔피언〉은 특별히 부각되는 인물 간의 갈등도,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빠른 전개도 부족한 영화다. 대립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속도감있게 펼친 전작 〈친구〉가 더 대중적이라 느껴지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신파’가 되기를 거부한 감독의 의도가 낳은 결과로도 보인다. 동양타이틀을 획득하고 돌아와 “나는 행복합니다”를 흥얼거리다 샤워장의 물줄기에 혼자 눈물을 흘리는 김득구의 모습처럼, 영화는 중간중간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고 꾹꾹 누른다. 링에 쓰러져 일어서려는 김득구의 최후의 모습 대신 삽입되는 어린 시절의 바닷가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보는 이에 따라 이런 절제력은 오히려 더욱 가슴을 아리게 할 것 같다. 〈챔피언〉은 대성통곡은 아니지만, 조용한 눈물이 차오르게 하는 영화다.

“권투만큼 정직하고 공평한 경기가 어딨나, 니 팔 세개 달린 사람 봤나.” 무엇보다 가난했지만 정직하게 자신의 삶을 ‘두들겼던’ 김득구의 모습은, 얄팍해진 지금 세상에 우직스럽지만 묵직한 울림을 던져준다.

김영희 기자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