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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방아쇠를 당겼나
2001-03-27

통신원다시/베를린

프리츠 랑 주인공으로 한 실명소설 <당신을 쫓아 세상 끝까지>, 진위에 관심

올해 초 출간된 아그네스 미쇼(Agnes Michaux)의 <당신을 쫓아 세상 끝까지>는 <메트로폴리스> <마부제 박사의 1천개의 눈>으로 유명한 영화감독 프리츠 랑을 주인공으로 한 실명소설. 유대계 독일인이었던 랑이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기 직전 베를린에서 보낸 마지막 며칠을 재구성한 이 소설은 별거중인 부인 테아 폰 하르보우를 찾아가 작별인사를 하는 대목에서 풍기는 음충한 냄새로 출간과 함께 화제를 모았다. 이 대목에서 <메트로폴리스>의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했던 부인 폰 하르보우는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겁나서 찾아온 모양”이라며 남편을 공격한다. “그런 당신은 사건 L에 대해 얼마나 결백해서”라며 비아냥거리는 랑. 이에 발끈한 폰 하르보우는 “총을 쏜 것은 내가 아닌 바로 당신”이란 대꾸를 통해 독자들에게 범죄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작가 미쇼의 설명은 더이상 없다. 사건 L의 진상을 밝히는 것은 랑의 영화 에 등장하는 조폭 깡패들이 그랬듯이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그 열쇠는 L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있다.

1922년 결혼한 테아 폰 하르보우는 공식적으로 랑의 첫 부인으로 알려져 있고, 랑 또한 폰 하르보우 이전의 어떤 여인에 대해서도 언급한 적이 없다. 그러나 1920년 작성된 모친의 사망신고서에는 며느리 리자 로젠탈(Lisa Rosenthal)이란 이름이 등장하는데, 바로 이 리자가 ‘L’의 주인공이다. 랑은 동료들에게 리자를 러시아에서 온 카바레 댄서, 혹은 오스트리아 출신 간호사로 소개했다고 한다.

베를린 키네마텍에 보관되어 있는 <메트로폴리스> 촬영감독 칼 프로인트의 육성 테이프에는 랑과 관련된 비화가 녹음되어 있다. 1920년 어느 가을 저녁, 그는 랑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당장 자신의 집으로 달려오라는 것이다. 프로인트는 제작자 에리히 롬머와 동료 카메라맨을 불러 함께 랑의 집으로 갔다. 거실에 들어선 세 사람은 피투성이로 싸늘하게 식어 누워 있는 리자 로젠탈을 보고 기겁했다. 테아 폰 하르보우와 함께 있던 랑은 리자가 권총자살을 했다고 말했다. 출동한 경찰한테도 같은 말을 되풀이했는데, 폰 하르보우가 랑의 증언을 확인해 주었음은 물론이다. 경찰은 리자 로젠탈이 남편의 권총을 몰래 꺼내 욕조에서 자살한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사건 L을 종결했다.

그러나 <메트로폴리스>의 세트감독 에리히 케텔후트의 부인이 리자의 자살론에 의혹을 제기했다. 리자는 친구인 그녀와 죽기 직전 전화를 해 쇼핑약속을 했으며, 외출하기 전 잠시 목욕을 하겠다고 말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한참 세월이 흐른 뒤 랑은 절친한 친구이자 <마부제 박사의 1천개의 눈>의 주연배우 하워드 베르논에게 테아 폰 하르보우와 몰래 거실에서 사랑을 나누다가 부인에게 발각되었는데, 화가 난 부인이 2층으로 올라가 곧바로 권총자살을 해버렸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러나 1956년 작품인 <의심을 넘어>에서는 자신과 비밀결혼한 부인 카바레 댄서를 권총으로 살해하는 주인공을 등장시킴으로써 죄책감을 못 이긴 고해성사가 아니었냐는 의심을 자아낸다.

작가 미쇼가 다시 끄집어낸 사건 L을 둘러싼 의혹을 풀어줄 수 있는 목격자도, 남아 있는 증거도 없다. 독자들은 랑과 폰 하르보우의 버전을 전해 들은 사람들의 토막이야기를 통해 사건의 전말을 애써 추측해 볼 뿐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올해 베를린영화제가 프리츠 랑 회고전을 계획하면서, 먼지 속에 파묻혀 있던 랑의 자료들이 몽땅 다시 햇빛을 보게 되는 바람에, 리자의 자살사건은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게 됐다. 결정적 단서는 리자 로젠탈의 사망확인서. 부검의는 리자가 1920년 9월25일 오후 7시경 베를린에 있는 랑의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기록하면서, 자살이라기보다는 불행한 사고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혹을 살짝 덧붙여놓았다. 리자의 경우 탄알이 가슴을 관통했는데, 권총 자살자의 경우 이마나 입에다 총부리를 겨누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설명과 함께.

부검의의 추측대로 탄알이 오발된 것이라면, 폰 하르보우와의 밀회현장을 들킨 랑과 리자가 티격태격을 벌였고, 와중에 누군가가 총을 꺼내 들었을 것이며, 이때 몸싸움을 벌이다가 랑의 실수로 총알이 발사되어 리자의 가슴을 관통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죄의식, 협잡, 부당한 혐의로 쫓기는 인물, 뜻하지 않게 살인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을 평생 작품의 주제로 삼았던 프리츠 랑, 결국 그의 전 작품세계를 관통했던 것은 리자의 가슴에 박힌 오발탄이 아니었을까?

베를린=진화영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