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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보고] 제37회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
2002-07-15

순수의 이름으로 예술에 갈채를!만약 당신이 프라하에서 체코의 매력에 취한 적 있다면 카를로비 바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독일 황제 카를 4세가 발견한 온천을 기반삼아 만든 휴양지 카를로비 바리는 유럽에서도 아름답기로 이름난 도시다. 7월4일 밤 11시, 프라하 공항에 도착해 차로 1시간30분을 달리자 숲속에서 반짝이는 건물들이 고개를 내민다. 오랜 세월 풍파에 씻긴 흔적을 간직한 체코 특유의 건축물은 거리 곳곳에서 위로 쏘아올린 조명에 빛을 발하고 여름에 무르익은 녹음은 도시의 향기가 되어 피부에 휘감긴다. 여러 군데 국제영화제를 다닌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카를로비 바리를 찬양하는 이유를 절로 알 것 같다. 칸의 권위를 대신하는 소도시의 사랑스런 풍경과 일반 관객의 열렬한 호응은 카를로비 바리를 동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제로 키워왔다.

카를로비 바리에서 만난 한국영화, 영화인산 속에 아담하게 들어앉은 도시 카를로비 바리는 중앙에 작은 운하가 있고 운하 양쪽으로 수백개의 작고 예쁜 호텔이 빈틈없이 늘어선 곳이다. 중심가는 테르말호텔에서 그랜드호텔 풉까지 이르는, 걸어서 15분 정도 되는 길이고 영화제의 메인 상영관은 테르말호텔이다. 사회주의의 힘과 권위를 자랑할 목적으로 지은 테르말호텔은 주변 경치에 어울리지 않게 큰, 진한 초콜릿색 건물. “이곳의 가장 거대한 흉물”이라는 비난을 받는 곳이지만 메인상영관, 영화제 사무국, 프레스센터 등이 들어 있는 이곳을 거쳐야 프레스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고 경쟁부문 출품작의 시사회도 여기서 열린다. 프레스카드를 받기 위해 개막 다음날인 7월5일 이곳을 들르자 명계남, 방은진씨가 반갑게 맞아준다. 명계남씨는 2000년 카를로비 바리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박하사탕>의 제작자로서 이번 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위원으로 초청받았고 방은진씨는 이스트필름(대표 명계남)에서 데뷔할 감독으로서 동행했다. 명계남씨는 “세계 3대 영화제에 들지는 못하지만 세계 5위 안에 드는 영화제에 심사위원 초청을 받은 것은 그만큼 한국영화의 위상이 올라갔다는 증거”라며 즐거운 표정을 숨기지 않는다. 실제로 지난해 열린 한국영화 회고전은 성황이었다. 영화제 집행위원장 에바 자오라로바는 명계남씨를 심사위원으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그간 한국영화에 대한 반응이 매우 좋았고 이런 교류가 계속되길 원한다”고 말한다. 올해 카를로비 바리는 <악어>에서 <나쁜 남자>에 이르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 7편을 모아 김기덕 회고전을 마련했고 경쟁부문에 민병훈 감독의 <괜찮아 울지마>, 호라이즌- 국제영화제 수상작(Horizon- Award Winning Films) 부문에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 또 다른 시선(Another View) 부문에 김성수 감독의 <무사>를 초청했다. 이밖에 미국 국적이지만 <디 아더스> 프로듀서 박선민씨가 데뷔작 <너무나 순수한>(Too Pure)을 들고 또 다른 시선 부문에 나와 장편영화만 11편이 유럽 관객 앞에 선보였다. “저는 착한 사람입니다”이번 영화제에서 가장 먼저 상영된 한국영화는 <취화선>이었다. 관계자가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7월5일 그랜드호텔 풉의 메인홀에서 상영된 <취화선>은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답게 일찌감치 모든 좌석의 입장권이 팔렸다. 집행위원장 자오라로바는 “유럽 여러 나라 영화관계자, 평론가들이 영화를 보고나서 대단히 클래식하면서 감동적인 영화라고 입을 모았다”고 분위기를 전한다. <취화선>에 이어 7시30분에 같은 장소에서 열린 <나쁜 남자> 상영은 김기덕 회고전의 첫 프로그램이었다. 400석 좌석은 이번에도 빈자리를 발견할 수 없었고 이날 새벽에 도착한 김기덕 감독이 무대인사에 나섰다. “저는 착한 사람입니다.” 한 문장씩 끊어 통역까지 배려한 김기덕 감독의 인사말은 정확히 네 문장으로 끝났다. “이 영화는 나쁜 영화입니다.” “착한 사람이 나쁜 영화를 만들 때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저는 착한 사람입니다.” 짧은 네 마디가 뜨거운 박수를 끌어냈다. 상영 도중 자리를 뜨는 몇몇이 눈에 띄긴 했지만 <나쁜 남자>에 대한 관객 반응은 좋은 편이었다. 박수와 함께 30여명의 관객이 감독의 사인을 받기 위해 자막이 다 올라가도록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상영 직후 열린 김기덕 회고전 기념파티에는 수십명의 기자와 영화제 관계자가 참석했다. 해외영화제 가운데 최초로 <악어>를 상영하면서 일찍부터 김기덕 영화에 주목한 스웨덴 우메아영화제 프로그래머 톰 팔멘은 김기덕 영화의 인기에 대해 “<섬>이 전환점이었다”고 말한다. “<섬>부터는 영화의 기술적 완성도도 뛰어난 작품이 됐고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게 됐다”고 덧붙인다. 독일영화사 판도라의 대표 칼 바움게르트너도 <섬>의 마지막 장면을 “마술”이라며 <섬>과 <나쁜 남자>를 김기덕의 최고작으로 꼽았다. 국내에서 고른 호평을 받은 <수취인불명>이 환영받지 못한 반면 <섬>과 <나쁜 남자>가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나쁜 남자> 다음날 김기덕 감독 인터뷰를 실은 영화제 데일리 뉴스는 그를 “한국영화의 신동”이라 표현하며 “관객이 참기 힘든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고가 마침내 관객이 전율하는 영화를 만든다”고 써놓았다.<괜찮아 울지마> 경쟁부문 올라

올해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의 경쟁부문에는 18편이 초청됐고 그중에는 민병훈 감독의 <괜찮아 울지마>가 들어 있다. 민병훈 감독 일행은 <괜찮아 울지마> 첫 상영 전날인 7월7일 입국해 다음날 기자시사회, 기자회견, 공식상영, ‘한국영화의 밤’ 파티까지 바쁜 일정을 보냈다. 타지키스탄의 잠셋 우스마노프와 함께 <벌이 날다>를 만들어 토리노, 테살로니키, 코트부스 등 3개 영화제에서 수상한 그는 두 번째 영화 <괜찮아 울지마>를 우즈베키스탄에서 찍었다. 지난해 완성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이 영화는 제작과정마저 영화의 제목을 닮았다. 애초에 제작비 투자를 약속한 곳은 김지운, 장진, 류승완 3인 감독의 인터넷영화를 제작했던 씨네포엠이었으나 지난해 우즈베키스탄에서 촬영하는 도중 제작비 송금이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초 예상한 제작비 8억원의 절반인 4억원에 간신히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을 위해 투자자를 물색하러 돌아다녔던 <괜찮아 울지마>는 서울영상벤처사업단의 투자를 받아 부산영화제 직전에 프린트를 완성했다.

<괜찮아 울지마>의 무대는 우즈베키스탄의 시골 마을. 거짓말 잘하고 게으른 한 청년이 도박빚 독촉을 피해 고향에 돌아왔다 낭패를 당하는 이야기로 <벌이 날다>와 마찬가지로 동화처럼 간결한 형식에 만든 이의 착한 심성을 담은 영화다. 상영에 앞서 “우즈베키스탄을 여행하다 만난 어떤 청년의 모습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작품”이라는 설명으로 인사를 대신한 민병훈 감독은 영화가 끝나고 다소 긴장된 표정을 보인다. 갑자기 영화의 결점이 눈에 들어온 탓일까? 1천여석 자리를 빈틈없이 메운 외국 관객의 반응이 불안해서일까? 어느 쪽이든 그로선 불안과 초조를 느낄 만하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찍은, 스타가 나오지 않는 영화를 국내 극장에서 쉽게 배급하기 힘들다는 사실 때문에 해외영화제의 반응은 대단히 중요하다. 딱히 <괜찮아 울지마> 한편의 흥행결과에 집착하기 때문은 아니다.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약간 뒤처진 현대를 살아가는 곳에 매력을 느끼는 민병훈 감독은 앞으로 만들 작품에서도 비슷한 풍광을 그릴 생각이다. 하지만 그러자면 안정된 제작시스템이 필요한데 과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해질 것인가? 지금으로선 영화제가 가장 유력한 대안인 셈이다. 가난한 예술가를 격려하는 영화제

실은 영화제가 필요한 이유도 여기 있을 것이다. 집행위원장 자오라로바는 영화제 카탈로그의 인사말에서 이렇게 적어놓았다. “우리는 오래 전에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중단했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실은 대다수 영화가 세상을 나쁜 쪽으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소수의 영화들은 고통받는 자들의 손을 잡게 만들고 그들에게 동조하게 만들며 우리와 달리 생각하는 사람을 이해하게 하고 결국 아름다움을 느끼는 범위를 넓혀준다. 그런 영화들이 영화제와 영화제 관객에 주로 의존한다. 영화제가 그런 영화들을 선전하면 할수록 그들은 제대로 대접받을 수 있다. 나는 37회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가 영화제 자체의 평판을 높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한발 나아가게 할 것이라고 믿는다.” 카를로비 바리가 명성을 유지해온 비결도 이런 믿음을 지킨 탓일 것이다. 거대한 영화제가 권위의식과 상업성에 물들어가는 동안에도 친절하게 일반 관객의 손을 잡고 가난한 예술가를 격려한 이 영화제는 매년 12만명 가까운 관객을 불러들이고 있으며 올해 참석한 관계자 수도 지난해에 비해 20%나 증가했다. 배낭여행을 하다 이곳에 들러 길에서 새우잠을 잔 뒤 아침부터 부지런히 영화를 보러다니는 유럽 젊은이들의 모습도 많이 눈에 띈다. 카를로비 바리가 아름다운 것은 중세식 건물과 거리풍경과 푸른 숲 때문만은 아니다. 창작자와 관객을 고루 배려하는 영화제와 상영 때마다 극장을 꽉 채우며 뜨거운 박수를 아끼지 않는 관객이 있기에 이곳은 이방인에게도 오래도록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카를로비 바리=글, 사진 남동철namdong@hani.co.kr▶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 집행위원장 에바 자오라로바 인터뷰[사진설명]1. 김기덕 감독 2. 영화제 풍경. 카를로비 바리는 배낭을 둘러멘 젊은이들도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올 수 있는 친근한 영화제다. 3. 영화제가 열리는 거리에 선 김기덕(왼쪽)감독과 <나쁜 남자> 제작사의 이승재 대표(오른쪽).4. 민병훈 감독의 <괜찮아 울지마>는 경쟁부문에 올랐다.카를로비 바리의 한국영화 사랑은 계속된다. 5. 회고전이 열린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 포스터 현수막은 행인들의 시선을 붙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