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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 사망, 영화배우로는 영원한 조연
2004-06-07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정치인으로서는 세계사의 주연 배우로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지만 영화배우로서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영화에 바쳤지만 한번도 오스카상 후보에 오른 적이 없고 출연작이 흥행 순위에 오른 적도 없는 그저그런 B급 영화 출연 배우였다. 그래도 레이건 스스로 당시 잘 나가던 배우 에럴 플린에 빗대 "나는 B급 영화계의 에럴 플린이었다"고 자부할 정도로 27∼54세였던 1937∼1964년에 무려 59편에 달하는 영화에 출연, 당시 미국인들에게 친근한 얼굴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는 영화배우가 되기 전 육군에 복무한 뒤 아이오와주 데이븐포트에 있는 라디오 방송국에서 스포츠 캐스터와 아나운서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방송국 경험을 발판삼아 그는 1937년 최초로 <사랑은 전파를 타고>라는 워너 브라더스사 영화에 출연했고 그후 2년 간 18편에 출연하는 등 데뷔 후 초기 4년 동안 28편을 몰아 찍었다. 주연을 맡지는 못했지만 험프리 보가트나 에드워드 로빈슨, 제임스 캐그니, 에럴 플린 등 남자 배우들과 베티 데이비스,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진저 로저스 등 유명 여배우와도 공연했다.

큰 키에 시원스런 미소, 절도있는 몸짓, 잘 가꾼 근육질의 체격에다 아나운서 시절 다듬은 명료한 대사전달력 등 모든 조건을 갖춘 그를 워너 브라더스사는 한때 제2의 로버트 테일러로 만들어 보려는 계획도 세웠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진짜 미국인 크누트 록크니(1940년)>, <헤이건 걸(1947)>, <베드타임 포 본조(1951)>등과 마지막 출연작이면서 유일하게 악역을 맡았던 <더 킬러스(1964)> 등이 있다.

또 레이건이 아침에 일어나 다리가 잘린 것을 발견하는 플레이보이 왕 역할을 맡았던 <왕의 노호(1942)>에서의 유명한 대사 "내 나머지는 어디로 갔나"는 1965년 출간된 자서전의 제목이 되기도 했다.

그가 배우로 더 크지 못하고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 말부터. 제2차 세계대전 중 그는 습작 영화 내레이터로 활동했으나 전쟁이 끝나자 사람들은 레이건이라는 배우를 거의 잊어버렸고 늙은이 역할이나 단역만 그에게 들어왔다. 동시에 이 시기는 그가 정치인으로 탈바꿈을 시작한 시기로 1947년 동료 배우였던 제인 와이먼과 결혼한 그는 당시 강력한 권한이 있었던 영화배우조합 위원장으로 뽑혔고 1959년과 1960년에도 위원장을 지냈다.

이 시기에 그는 역시 배우였던 낸시 데이비스와 1952년 재혼했고 제너럴일렉트릭(GE)사의 대변인으로 TV에도 모습을 드러냈으며 1964년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당적을 옮기면서 영화배우가 아닌 정치인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