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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없던 평론가
2001-06-11

소니 픽처스, 유령 평론가가 쓴 자사 영화들 호평문 기재 논란

소니 픽처스 엔터테인먼트가 존재하지 않는 평론가 이름으로 지어낸 호평을 영화광고에 인용해온 사실이 <뉴스위크>에 의해 폭로됐다. 코네티컷주의 지방 주간신문 <리지필드 프레스>의 평론가 데이비드 매닝이라고 광고에 표기된 유령 평론가는, 지난해 7월부터 <할로우맨> <패트리어트: 늪 속의 여우>, 롭 슈나이더 주연의 코미디 <애니멀>에 대해 극찬해왔으며, 근작 <기사 윌리엄>의 광고에도 주연 히스 레저를 올해의 가장 유망한 신인스타로 지목한 그의 글이 인용된 바 있다. 이 조작극을 밝혀낸 <뉴스위크>의 존 혼 기자는 주요 평론가 초청시사가 열리지 않은 시점에서 무명 평론가들의 찬사로 장식된 <기사 윌리엄>의 광고가 난 것을 보고, 각 필자에게 연락을 취하다가 데이비드 매닝이 존재하지 않으며 <리지필드 프레스>에도 그런 이름의 평론가가 기고한 사실이 없음을 발견했다.

망신스런 사태에 직면한 소니 픽처스의 수잔 틱 대변인은 6월4일 기자회견을 열어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문을 연 뒤 데이비드 매닝의 인용문을 누가 만들어냈는지 내부조사 뒤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스튜디오 임원들은 전혀 알지 못했던 일이라고 부언했다. 현재 소니의 내부조사는 광고부서(promotion)에 집중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써 예고편 상영에 돈을 지불하지 않는 관행을 깨고 최근 <애니멀>의 1분짜리 예고편을 <미이라2> 앞에 상영하는 조건으로 4개 극장체인에 10만달러를 지불해 다른 스튜디오의 반발을 샀던 소니는 회사의 도덕성이 걸린 더 큰 구설수에 휘말리고 말았다.

이번 파동의 ‘미스터리’는 과연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번거로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가상의 평론가를 지어낼 필요가 어디 있느냐는 점. 영화광고에 박힌 상투적인 호평이 흥행에 큰 영향을 끼치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데다가, 문제의 평문이 홍보에 활용된 소니의 영화 중 몇면은 이미 <시카고 선 타임스>의 로저 에버트, <롤링스톤>의 피터 트래버스 같은 주요 평론가로부터 긍정적인 리뷰를 얻고 있다고 은 지적했다. 무엇보다 이상스런 점은, 자기 글이 포스터에 활자로 박히고 신작 시사 정켓에 초대만 해주면 얼마든지 호의적인 평을 제공할 평자들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굳이 가상인물을 만들어냈다는 점. <할리우드 리포터>의 영화마케팅 담당기자 말라 매처 로즈는 “정말 수수께끼다. 내부의 누군가가 그저 놀이삼아 한 일인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꼭두각시 평론가를 만들어냄으로써 소니가 얻은 이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히트작 <빅 대디>를 패러디해 주인공과 원숭이가 벽돌담에 기대 있는 사진을 광고 비주얼로 쓴 <애니멀> 포스터는, 매닝의 이름으로 인용된 “<빅 대디>의 제작팀이 또다른 승자를 냈다”는 평과 손발을 맞춰 <애니멀>을 자사의 흥행작과 연결시키면서 동일한 관객층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마케팅 전략에 정확히 일치하는 평을 편리하게 갖다붙일 수 있었던 셈. 그러나 좀더 넓게 보면 권위있는 비평가들에게서 좋은 평을 끌어내지 못하면 앞뒤 맥락을 잘라낸 아전인수격 인용이나 지명도 낮은 평자들의 단순 호평에 의존하는 스튜디오의 마케팅 관행이 선을 넘은 경우라 볼 수 있다.

데이비드 매닝 사태에 대한 미국영화계의 반응은 “한심하고 어처구니없다”가 주류. 전미비평가협회 대표 피터 레이너는 스튜디오의 마케팅에 휘둘리는 비평문화의 결과물이라는 해석을 내린 반면, 방송·영화평론가협회장 조이 베를린은 “지나친 일이지만 놀랍지는 않다. 반면 우리가 영화사에 순응한다면 이런 조작도 필요없었을 테니 평론가로서 혐의를 벗은 기분도 든다”는 익살스런 코멘트를 남겼다. 한편 <애니멀>의 주연배우 롭 슈나이더는 사건 직후 <레이트 레이트 쇼>에 출연해 “소니는 아마 사태를 책임질 마케팅 직원을 하나 발명해낼 것”이라고 짓궂은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김혜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