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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의 해석남녀] <내 남자의 로맨스>의 현주
정이현(소설가) 2004-07-30

만 서른 두 살인 두 여자, J양과 H양은 환한 주말 오후 사이좋게 영화를 보러갔다. 주 5일 근무라나 뭐라나 세상이 좋아진 건 분명한데, 덩달아 주말은 길어지고 특별한 스케줄은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약속 없는 주말의 무료함이 싱글여성의 정신세계에 미치는 복잡한 영향에 관해서라면 둘은 이미 박사학위 논문 정도는 가볍게 쓸 수 있는 처지의 처자들이었다. 영화에는 멀쩡한 남자친구가 바람났다고 오해하며 ‘생 쇼’를 펼치는 스물 아홉 살 짜리 여주인공이 등장했다.

“야. 스물 아홉 살이면 몇 년 생이냐” “몰라. 75 76 그냥 네가 태어난 해에다 4를 더해 봐. 그럼 답 나오겠네.” “누가 듣겠다. 그런 걸 큰소리로 말하면 어떻게 해!” “어머, 내 목소리가 좀 컸나 걱정 마. 우리가 나름대로 이렇게 어려 보이게 하고 다니는데 설마 삼십대로 보이겠냐. 서른 넘고 나서는, 정장 브랜드에서는 절대 옷 안 사 입고, 노숙해 뵈는 빨간 립스틱은 아예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니까.” “하긴 나도 그래. 그나저나 현주인가 하는 걔. 좀 짜증나지 않냐. 결혼 못해서 아주 안달이 났더라. 스물 아홉이 뭐 대수라고 난리야, 난리가. 지금 제가 얼마나 좋은 나이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말이야.”

스물아홉이 뭐 대수라고 결혼 못해서 ‘생 쇼’라니‥언니들 정말 짜증난다

“그러게. 내가 지금보다 네 살이 어리다면 매일 춤추고 다니겠다. 근데 <싱글즈>의 나난도 그러더니 왜 영화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노처녀들은 죄다 스물 아홉 살 인 거야 전쟁터에 총알받이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걔들 서른 살 맞이하는 자세가 너무나 비장하지 않아” “꼭 일이냐, 결혼이냐,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놔야 삼십대를 시작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스물 아홉 살 짜리 남자가 자기 나이의 무게 때문에 괴로워하는 영화 본 적 있어 이게 바로 서른 넘은 여자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재생산하는 거라고!” “또 걔들 성격은 왜 하나같이 비슷비슷한 건데 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도 그렇고,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도 그렇고 다 귀여운 푼수잖아. 사회생활이 어떻든 간에 일상에선 살짝 ‘어리버리’ 하다고. 하이힐 신고 또각또각 걷다가 맘에 드는 남자 앞에서 갑자기 삐끗 넘어져주는 바로 그 사랑스러움. 괜찮은 남자주인공들은 또 다 그 면에 혹하잖아. 아 진짜 식상해.”

갑자기 J양이 심각한 표정으로 H양에게 속삭였다. “그런데 말야, 혹시 무슨 학원 같은 게 있는 건 아닐까 귀엽고 사랑스러운 노처녀 되기 속성 반 같은. 온 세상 여자들 다 아는데 바보처럼 우리만 모르고 앉아있는 거 아냐” “우리처럼 사사건건 냉소적이고 분석적인 여자들도 받아줄까” “아마도 수강료 두 배로 내라고 하고, 열등 반에 집어넣지 않을까.” “거기 나오면 김상경 같은 애인이 짠, 하고 나타나려나” “야, 정신차려. 넌 영화 잘 보고도 그러냐. 오늘 영화의 교훈은 그거잖아. ‘안됐지만 멋진 남자는 운 좋은 X이 일찌감치 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