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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판타지, 현실 위에 핀 시(詩) 혹은 한숨
2001-07-12

대학 1년 때던가. 중간고사 시험을 치고 나오니, 어느 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날은 어둑하고 바람까지 서늘하게 불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비가 내리는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학교를 나섰다. 버스를 타고 허름한 청계천의 아세아 극장으로 갔다. 눅눅하게 습기를 머금은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극장 안에는 거의 사람이 없었다. 가방을 옆자리에 던지고, 편하게 반쯤 누운 자세로 영화를 봤다. <천녀유혼>이었다.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귀신과 인간의 사랑 이야기.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곳의 이야기를 보면서, 나는 푹 빠져들었다. 끝나고도 일어나지 않고, 다시 한 번 더.

<천녀유혼>은 그 순간의 나에게, 가장 절실한 무엇이었다. 사랑이 아니라, 그 정서적인 판타지가. 아마도 비를 보던 그 순간 다른 공간으로 가는 문을 발견했다면, 나는 극장 같은 것은 떠올리지도 않고 당장 문을 열고 들어섰을 것이다. 가끔은, 아니 자주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흔히 극장을 찾았다. 실연을 당했다거나,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했다거나, 엄청난 위기가 닥쳤다거나 하는 큰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그냥 머리가 복잡할 때, 일에 지칠 때 한숨 돌리기 위해 나는 ‘판타지’를 찾았다.

그냥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나는 다른 시공간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누구는 그것을 허황되다고 생각하지만, 나에겐 그것이 우리 인간의 다른 가능성처럼 보인다. 다른 상황에 처했을 때, 인간은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할 것인가. 현실이라는 것이 철저하게 과학적인 논리에 의하여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은 다만 우리가 증명한 것들뿐이다. 증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은 결국 판타지로 포용된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자신하지만, 직접 부닥치면 그 불가해성에 허우적거리는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나에게 사랑이란 늘 판타지다. 내가 결코 알 수 없는 것.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돌아보니 전혀 낯선 그 무엇. 그 ‘낯섬’을 발견할 때 나는 황홀한 매력을 느낀다.

현실 속에서는 쉽게 벌어지지 않을 법한 그 무엇. 이를테면 악령이라든가, 마법이라든가, 미래의 세계 같은 것들. 우리 인간의 머리 속에서나 가능한 것들을 만들어내는 그 무엇. 우리가 영화에서 그런 ‘판타지’와 조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영화가 처음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할 때, 눈에 보이는 것들에게 이름을 붙여주던 때 멜리에스가 나타났다. ‘마술사’였던 멜리에스는, 영화가 자신의 ‘마술’을 현실로 만들어줄 매체라고 생각했다. 허구의 시간과 공간을 현실로서 체험하게 만드는 것. 시간을 조종하고, 공간을 만들어내면서 멜리에스는 자신의 마술을 필름에 담았다. 1회 부천영화제에서 상영된 멜리에스의 <달세계 여행>은 인간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준 최초의 마술이었다. 그 마술은 언제나 인간이 꿈꾸었던 무엇이다. 그리고 영화는 인간의 꿈을 현실로 바꾸어주는 가장 ‘사실적인’ 매체다. 요즘의 디지털 애니메이션이 더욱 그렇다.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모든 것을 디지털 애니메이션은 만들어준다. 우리가 공룡을 보고싶다고 하면, 공룡을 만들어준다. 악령을 만나고 싶어한다면, 나타나게 해준다. 그것은 분명 테크놀러지가 우리에게 안겨준 즐거움이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꿈을 협소하게 만들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공룡이야 화석을 통해 재현하는 것이지만, 상상 속의 그 무엇은 다르다. 우리가 이름을 부르는 순간 ‘마법’이 깨어지는 것처럼, 구체적인 영상으로 드러나는 순간 상상력은 그 틀 속에 묶여버린다.

하지만 잊어버리지 말아야할 것이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모든 영화는 판타지 아니던가. 모든 것은 픽션이다. 자신의 고백을 영화라는 매체에 담는다 해도, 그것 역시 하나의 판타지일 뿐이다. 너무 확장시킨다고? 맞는 말이다. 사실성과 환상성의 구별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고, 사실과 허구 역시 다른 것이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이 등장한 것은, 도저히 사실적인 어법으로 담을 수 없는 ‘엄청난 현실’ 때문이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인디오의 ‘마법’ 때문이기도 하고. 인디오의 마법은 그들의 현실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현실을 고발하고, 꿈꿀 자유는 주었다. 판타지란 우리의 지독한 현실 언저리 어딘가에서, 혹은 이면에 자리잡은 광기와 몽환의 기억이다. 논리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감성과 욕망으로는 토로할 수 있는, 그 진정성을 느낄 수 있는 시(詩)와 한숨 같은 것들. 그래서 판타지는 아름답고, 또 비참하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피안의 땅임을 알기에. 정반대로 이 남루한 현실의 시대착오적인 농담임을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