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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2001-08-17

여성들, ‘낡은 것’을 밀어내고 ‘새 꿈’을 펼치다

집행위원장 비롯 여성들이 이끄는 영화제로 변신, 올해의 주제는 ‘타인’과 ‘다른 곳’

8월2일 일본감독 히로누부 사카구치의 최신 애니메이션 <파이날 환타지>로 개막해, 12일 폐막하기까지 제54회 로카르노영화제에서 화제의 중심에는 ‘여성’이 있었다. 스위스 남부 이탈리아어권의 도시 로카르노에서 열리는 이 영화제는 지난해 모난 성격으로 구설수에 오르던 마르코 뮐러 집행위원장이 물러난 뒤 많은 변화를 겪었다. 올해부터 로카르노영화제를 이끄는 사람들은 모두 여성이다. 새 집행위원장 이렌 비냘디(58)는 이탈리아 일간지 <레푸브리카>에 영화평을 써온 이탈리아의 저명한 영화평론가.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한 그는 한때 베니스영화제에서 ‘베니스의 밤’ 프로그램을 담당했었고, 그 밖에도 크고 작은 영화제를 맡아온 영화제 전문가다. 부위원장 역시 여성인 테레사 카비라가 맡았다.

여성들이 영화제를 이끌면서 변화는 곳곳에서 나타났다. 먼저 9명의 심사위원 가운데 7명이 여성이었다. 지금까지 어떤 영화제서도 없었던 일이다. 제인 매스린(전 <뉴욕타임스> 영화편집장), 케리 폭스(지난해 베를린영화제 최우수 여배우상 수상자), 올리비아 스테워트(영국의 이름난 여제작자)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여성영화인들이 올해 심사를 맡았고 경쟁부문에 오른 19편 중 7편의 영화가 여성감독의 작품이었다.

문승욱 감독의 <나비>, 호평 일색

19편이 경합한 경쟁부문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 유럽영화가 대세를 차지했다. 아시아영화는 모두 4편. 마르코 뮐러 전 집행위원장은 중국과 일본영화에 편중된 관심을 보였지만 올해는 경쟁부문에 홍콩영화 한편만 보였다. 대신 문승욱 감독의 <나비>가 오랜만에 로카르노를 찾았다. 이 영화제는 배용균 감독에게 황금표범상을 안겨준 인연에도 불구하고 2년 전 <이재수의 난>이 소개된 박광수 감독을 제외하면 새로운 한국영화 찾기에 무심했다.

이번 영화제의 메인 테마는 ‘타인’, 그리고 ‘다른 곳’이었다. 문승욱 감독의 <나비>는 주제에 잘 어울리는 영화였다. 독일에 거주하다 자신의 고통을 잊기 위해 ‘망각의 바이러스’가 출몰하는 한국을 찾는 안나, 환경오염의 희생자인 관광가이드 유키, 고아원 출신으로 가족을 찾고 싶어하는 운전사 등 현재의 자신을 버리고 싶어하는 세 사람이 긴 수행 끝에 타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또 하나의 자신과 만난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비>는 현지 기자들로부터 “끝부분이 감동적이다”, “바닷가의 해산장면은 감동의 일색이다”, “배우들의 연기가 마음에 들었다”는 호평을 받았다.

경쟁작품 가운데 평단과 관객 사이에 가장 인기가 높았던 영화는 프랑스 안 퐁텐 감독의 <어떻게 내가 아버지를 죽였는가>. 어느날 갑자기 집을 나간 아버지가 30년 만에 돌아온다. 아버지는 아프리카에서 아주 존경받는 의사가 되어 있지만, 그가 없이 자란 두 아들에겐 타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출현으로 큰아들의 삶은 파탄에 이른다.

영화제의 또다른 테마는 ‘역사와 기억’. 7일 저녁 피아차 그란데 광장에서 상영된 스페인감독 모트소 마르멘 다리즈 감독의 <깨진 침묵>은 2차대전이 끝날 무렵 프랑코의 파시즘에 맞섰던 무력투쟁의 역사적 의미를 여성의 기억을 통해 캐묻는다. 이탈리아감독 마우리지오 시아라의 에서는 1975년 포르투갈에서 독재에 반기를 든 군인들의 혁명이 역사적 배경이다(2CV는 프랑스 자동차 되슈뵈를 뜻한다). 감독은 프랑스에 망명온 포르투갈 학생과 그의 프랑스 친구 그리고 그 두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한 여자의 관계를 바탕으로 70년대를 되돌아본다. ‘오늘의 감독들’부문에는 일본과 프랑스에서 활동해온 최재은 감독의 <길 위에서>가 소개됐다. 나치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비극, 일본의 군국주의와 한국전쟁, 그리고 남북분단의 문제를 베를린부터 판문점까지 오가며 성찰한 다큐멘터리이다.

9편의 데뷔작들, ‘젊은 로카르노’ 시절 환기

올해 로카르노는 미국의 아시아인에게 회고전을 바쳤다. ‘그늘에서 벗어나, 미국의 아시아인’은 할리우드영화에 비친 아시아인의 모습을 분석한 좀처럼 쉽게 볼 수 없는 묵직한 프로그램으로, 1915년부터 2001년까지를 망라한 60편의 영화를 상영했다. 한마디로 할리우드감독이나 제작자들은 자국의 소수민족에 대해 너무 알지 못했고 관심이 없었다. “요즘 할리우드가 실력있는 중국과 일본감독을 불러들이고, 국제적으로 성공한 이들의 영화를 베끼는 데 바쁘지만 동양인에 대한 비틀어진 고정관념은 아직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회고전에 초청된 <뜨거운 차 한잔>이 상영된 뒤 감독과의 대화에서 웨인왕은 오늘의 할리우드도 그다지 변한 것이 없다고 질타했다.

로카르노영화제는 전통과 이름에 비해 가난하다. 제대로 다듬어진 영화관 하나 없고 주상영장 페비극장은 평소에 창고로 쓰이는 낡은 건물이다. 그런데도 해마다 18만명의 관객 수를 기록하고, 그 숫자는 해마다 늘어난다. 감독의 데뷔영화와 두 번째 영화들을 대상으로 유럽의 신인감독 등용문 역할을 해오다가, 최근 신인제한구역의 역할을 벗어났지만 칸과 베니스, 또는 베를린영화제들이 하지 못하는 중간역할을 착실히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새 집행부가 들어선 올해엔 9편의 데뷔작품이 경쟁부문에 올라 로카르노의 젊던 시절을 환기시켰다.

로카르노=임안자/ 해외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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