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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카르노 수상작 <나비>
2001-09-27

해외영화제에서 먼저 호평을 받은 국내영화가 관객들의 호응을 얻기란 쉽지 않다.

로카르노 황금표범상 수상작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흥행기록도 신통치 않았고 베니스영화제와 몬트리올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따낸 「씨받이」나 「아다다」도 마찬가지였다.

최근 들어서는 김기덕 감독의 사례처럼 해외영화제용과 국내흥행용 영화의 거리가 더욱 멀어져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10월 13일 일반 관객에게 처음으로 선보이는 「나비」도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청동표범상)과 젊은 비평가상을 차지한 데 이어 밴쿠버, 런던 등에 잇따라 도전장을 낸 상태여서 기대와 함께 우려를 던져준다.

이야기의 무대는 2001년 이후 가까운 미래의 서울. 산성비가 내리고 납중독 환자가 득실거리는 이곳에 잊고 싶은 기억만을 지워주는 망각의 바이러스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모여든다.

독일 이민 간호사의 딸인 안나 역시 어두운 기억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울을 찾아 유키의 안내로 바이러스를 전염시키는 나비를 좇는다.

둘을 태운 택시운전사 K는 안나와는 반대로 옛날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애를 쓰는 인물. 고아원에 들어가기 전 어릴 적 사진을 조수석 앞에 붙여놓고 알아보는 사람을 기다린다.

K의 신고로 납중독 환자 수용소에 끌려갔던 유키는 안나의 도움으로 풀려난 뒤 바닷 속에서 아기를 낳고 숨진다.

기억의 회복을 바라는 사람과 망각을 위해 애쓰는사람의 매개자였던 유키가 세상을 떠난 뒤 K와 안나는 유키의 아기를 통해 각기 상처를 치유할 희망의 백신을 발견한다.

옛날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는 "호랑이나 핵폭탄보다 무서운 것이 망각"이라는 노인의 말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세월이 약"이라는 정반대의 모티브에서 출발한다.

그것도 잊고 싶은 기억만을 지울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나 유키는 고객들의 망각을 도와주면서도 나중에 다시 기억을 되살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여권 등을 차곡차곡 보관한다.

안나 역시 지워진 기억을 되살려내라고 여행사에서 호소하다가 허탈감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는다.

폴란드에서 수학한 문승욱 감독은 망각과 기억의 갈림길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묻는 동시에 미래 사회에 대한 경고를 던진다.

관객들은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나 「투발루」를 연상케하는 블루톤 화면의 아름다움에 빠졌다가도 "보기에만 좋지 다 썩은 물이에요"라는 K의 대사를 듣고 화들짝 놀라게 된다.

로카르노 청동표범상에 빛나는 김호정(안나)의 원숙한 표정, 부천초이스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강혜정(유키)의 신선한 매력, 낯설고 어색하면서도 안정감을 보여주는 장현성(K)의 캐릭터 등도 모처럼 상업적으로 포장되지 않은 연기의 재미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문승욱 감독은 안성기 주연의 장편 데뷔작 「이방인」에 이어 끈질기게 인간 사이의 소통 문제에 천착하고 있지만 정작 관객과의 소통에는 익숙지 못한 것 같다.

주제 의식은 뚜렷하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던 탓일까.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밋밋한 극적 구성과 산만한 줄거리는 보는 사람들의 집중력을 떨어뜨려 지루함을 느끼기 십상이다.

(서울/연합뉴스)